아버지의 목소리는 화를 억지로 억누르고 있었다. 믿었던 딸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 느껴져,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일주일이 넘게 지방출장을 다녀오시던 날, 피곤한 아버지의 발걸음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을 큰딸의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깜짝 놀라며 기뻐할 딸의 모습을 상상하며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 교실복도에서 딸을 찾고 있었던 시간에, 딸은 친구들과 함께 동호회 소식지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딸은 아버지의 실망감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아버지에게 큰딸은 기대와 자랑의 대상이 아니던가. 자라면서 한 번도 실망감을 준 적이 없었는데. 그러나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아니 건 아니었다. 아버지와 그날 학교에서 마나기로 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하지만 저랑 언제 약속하셨어요. 저는 기억에 없는데요.”

“어디, 손가락 걸고 한 것만 약속이 라더냐?인간고 인간 사이엔 약속하지 않은 약속이 있어.”

그때 난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겐 약속하지 않은 약속들이 더 중요하고, 꼭 지켜야 하는지 모른다. 엄마가 아이를 낳는 순간 저절로 생겨나는 약속, 남자와 여자가 결혼서약을 하면서 생겨나는 약속, 선생님과 제자, 기업과 소비자, 대통령과 국민....... 이 모든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약속들을 기억하고 지킨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난 매일매일 약속을 기억한다. 아이들과 한 약속, 남편과의 약속, 부모님, 회사, 이웃과의 보이지 않는 약속을 언제나 내 게으름을 깨워 행동하게 하고 목표를 설정하게 한다.

오늘도 나는 내 딸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 내리는 올림픽공원을 찾았다.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은 도전의 기회를 주겠다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