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이번에도 전차 태워 줄 거야?”

해주는 으리으리한 기와집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명륜동 골목을 나서며 들뜬 얼굴로 물었다. 분희가 안방마님 심부름으로 건어물을 사러 남대문 시장에 가는 걸 알고 따라나선 길이었다.

“알았어. 내가 오늘 인심 썼다!”

분희는 볼우물을 지으며 해주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때 마침 전차가 땡땡땡 종을 울리며 다가왔다. 그런데 전차가 거의 남대문 역에 닿을 때쯤 사람들이 손에 일장기를 든 채 급한 걸음으로 경성역 쪽으로 가는 게 보였다.

“언니, 우리도 저 쪽으로 가보자, 응?”

구경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좋아하는 해주는 남대문 역에서 내리자마자 분희를 졸라댔다. 경성역 가까이 가자 엷은 청록색 군복에다 군인 모자를 쓴 수많은 젊은이들이 웅성웅성 모여 서 있는 게 보였다.

“오늘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들을 위한 출정식이 열리는 모양이구나. 요즘 일본이 미국, 유럽 여러 나라들과 전쟁을 하고 있대. 그래서 군인들이 모자라니까 우리 조선의 젊은이들까지 대일본제국과 천황폐하를 위한 일이라며 전쟁터로 끌고 가고 있단다.”

분희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식이 시작되자 마이크에서 기미가요가 흘러나오고 한바탕 높은 사람들의 훈시가 이어졌다. 그 뒤를 이어 군인들은 모두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항하여 절하고, 일장기를 높이 든 채, 만세, 만세, 만세를 세 번 외쳤다. 마침내 식이 끝나자 군인들은 구령에 맞춰 하나 둘 역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역 안에는 벌써 군인들을 싣고 갈 까만 기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저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서 다시 배를 타고 먼 곳으로 가는 거래.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말레이시아 반도, 뉴기니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같은 데로.”

“아이고, 일본놈들이 일으킨 전쟁에 왜 조선 젊은이들이 총알받이로 가야 하는지……. 이제 가면 몇 명이나 살아서 돌아오려나, 으흐흑!”

배웅을 나왔던 부모형제들은 군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였다.

“해주야, 우리도 이제 그만 가자.”

또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떠나는 걸 보며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 분희는 무겁게 말했다. 하지만 해주는 어느 새 슬픈 장면을 다 잊은 듯 누군가가 떨어뜨리고 간 일장기 하나를 주워들고는 군악대의 신나는 음악에 맞춰 팔짝팔짝 남대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곤 단골가게인 목포상회에 들어가 안방마님이 주문한 미역이며 새우, 멸치 같은 건어물을 사들고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일장기를 팔랑개비처럼 흔들며 대문으로 들어서던 해주는 사랑채 마당에 나와 있던 주인어른을 보자 움찔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저 아이 손에 든 일장기는 어디서 났느냐?”

주인어른이 낮지만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경성 역에서 떠나는 군인 출정식 구경을 갔다가…….”

분희는 고개를 조아린 채 말끝을 흐렸다.

“음, 아무리 어리기로서니 일장기를 든 채 버젓이 우리 집 대문을 넘어온단 말이더냐! 잘 들어라. 우린 지금 비록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말과 글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국기, 태극기가 있느니라.”

주인어른은 해주와 분희를 사랑채로 불러서는 책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 뒤편에서 동그랗게 생긴 종이통 하나를 꺼내어 조심스레 그 안에 든 걸 펼쳐 보여주었다.

“잘 보아라, 이게 바로 우리의 태극기니라. 지금은 비록 일본 놈들 때문에 이렇게 숨겨둬야 하지만, 언젠가 마음 놓고 이걸 걸어놓을 수 있을 때가 반드시 올 게다.”

‘태극기, 우리나라 국기!’

난생 처음 태극기를 본 해주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함께 가슴이 떨려왔다.

‘바보, 등신! 멍청이!’

해주는 사랑채를 나오자마자 자신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으며 행랑채 아궁이 속에 일장기를 쿡 쑤셔 넣었다.

그 날 이후 해주는 무언가 가슴 속에 돌멩이가 들어있는 듯 갑갑했다. 태어나서 열두 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일장기가 남의 나라 국기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날 밤, 해주는 조심스레 분희에게 물었다.

“언니, 우리나라 글자 쓸 줄 알아?”

“마님이 도련님한테 가르쳐주는 걸 어깨너머로 배웠어.”

“나도 좀 가르쳐 줘.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글자도 모르면 바보잖아.”

그 날 밤부터 해주는 분희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기역, 니은, 디귿……우리 글자들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고는 얼마 안 가서 제 이름은 물론 한글을 제대로 쓸 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통교에서 참빗 장사를 하는 아버지에게 점심을 갖다 드리러 가는 친구 를 따라나선 해주가 마악 광교 앞을 지날 때였다.

“어이, 거기 꼬마 조센징! 누가 이렇게 구린내 나는 똥통을 들고 큰 길을 오가라고 했나!”

갑자기 일본 순사 하나가 거름통을 지고 가는 남자 아이를 불러 세우더니 다짜고짜 뺨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아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순사를 빤히 노려보다간 겁도 없이 말대꾸를 하였다.

“순사 나리, 이건 똥이 아니라 땅을 기름지게 하는 거름입니다. 이 거름이 없다면 어떻게 배추가 자라고 무가 자라며 채소가 자라겠습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이 조센징 녀석이 감히!”

일본 순사는 또 다시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아이는 얼굴이 빨개진 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일본 순사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지금 나를 노려보는 겐가? 에잇!”

일본 순사가 또 다시 손을 들어 아이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그때였다. 세 번이나 뺨을 맞은 아이는 갑자기 들고 있던 똥바가지 가득 똥을 퍼서는 일본순사에게 홱 뿌렸다.

“순사나리, 나리의 똥은 더러워서 거름으로도 쓰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오로지 조선 사람의 똥만 필요할 뿐이니까요!”

“뭐야, 으, 으아악!”

똥바가지를 뒤집어쓴 일본 순사는 길길이 날뛰며 곤봉으로 아이를 이리저리 후려쳤다. 그러다가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게 부끄러웠는지 구린내를 풍기며 어디론가 마구 달려가고 말았다. 해주는 행여 그 아이가 해코지를 당하면 어쩌나 겁이 나 큰소리로 외쳤다.

“빨리 도망가! 일본 순사들이 널 잡으러 달려올지도 몰라, 어서!”

“그, 그래, 알았어.”

아이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지 서둘러 똥지게를 지고는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얼마 후, 주인어른의 생신 전 날이었다. 왕십리 밖에서 소작을 짓고 있는 최 서방이 달구지 가득 채소를 실어왔다. 무심코 최 서방을 도와 채소를 나르던 남자아이를 바라보던 해주는 소스라쳐 놀랐다. 그 아이는 며칠 전 일본순사에게 똥바가지를 퍼부은 그 아이가 분명했다

“너보다 두 살 위인 열 네 살인데 벌써 반 농사꾼이 다 되어 제 아비를 돕고 있다지 뭐냐.”

엄마가 부러운 듯 말했다. 그 때 마침 부엌으로 들어오던 돌석이도 해주와 눈이 마주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너, 너는?”

일본순사 앞에서는 그렇게도 당당하던 돌석은 얼굴이 빨개진 채 어쩔 줄 몰랐다.

“그 날 왜 그랬어? 나 같으면 무서워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 했을 텐데.”

“나도 몰라. 사대문 안에 똥지게를 지고 왔다는 일본 순사의 말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났어. 일본 놈들 미워! 남의 나라에 와서 제 멋대로 굴잖아!”

돌석은 새삼 그 날이 떠오르는지 울근불근하였다.

날이 밝자, 여기저기서 친척들이 한 분 두 분 모여들었다. 모두 주인어른의 생신을 축하 하러 오신 분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때 같으면 흥겹게 먹고 마시며 웃음꽃을 피웠을 어른들이 밥을 먹자마자 모두 사랑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은 채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 후, 갑자기 대문이 부서져라 열리면서 일본 순사 서너 명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우강, 집에 있나?”

금테 안경을 쓴 일본 순사가 다짜고짜 주인집 맏아들을 찾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강 도련님은 지금 집에 안계십니다.”

아버지가 얼른 나서서 대답했다.

“뭐라? 그 놈이 제 애비 생일에도 집에 안 들어 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

대문 앞이 소란스러워지자 주인어른이 사랑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내 아들 우강이는 지금 몸이 아파서 절에 요양을 하러 떠난 지 오래요.”

주인어른은 침착하게 말했다.

“으하하하, 조선의 대지주이자 양반인 이시창 나리께서도 새빨간 거짓말을 한단 말이오? 당신 아들이 학교에서 몇몇 학생들과 비밀단체를 만들어 대일본제국을 비방하는 유인물을 만들고 일본이며 중국에 있는 젊은이들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소? 게다가 그 뒷돈을 대주고 있는 게 바로 당신이라는 것도!”

“허허, 안에서 조용히 서책이나 읽고 있는 내가 뭘 어찌한다는 게요? 대일본제국이 지주들의 숨통을 다 틀어쥐고 있는 판에 어디 쌀 한 섬, 보리 한 섬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이까? 괜히 생사람 잡지 말고 어서 돌아가시오.”

주인어른은 말을 마치고 다시 사랑방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하지만 일본 순사도 만만치 않았다. 저벅저벅 사랑채 마루로 올라와서는 손님들이 모인 사랑방 문을 휙 열어 젖혔다.

“이 판서 댁 일가붙이들이 여기 다 모여 무슨 꿍꿍이짓들을 하고 있는 거지? 이제 보니 하나같이 신사참배도, 창씨개명도 하지 않고 대일본 천황을 우롱하는 불손분자들이 다 모여 있군! 하지만 내 조만간 당신네들을 싹 잡아들여 치도곤을 낼 테니 그리 아시오!”

일본 순사는 으름장을 놓고는 칼바람을 일으키며 휙 나가버렸다.

그 날 밤, 조그만 창문으로 누군가가 조그만 돌멩이를 던진 듯 톡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분희가 다급하게 들창문을 열었다.

“저, 김상수입니다. 전할 게 있으니 잠시, 밖으로 좀 나오십시오.”

분희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던 큰 기와집 도련님이었다.

“상수 도련님이 우강 도련님의 편지를 가지고 왔단다. 그걸 주인어른께 전해드리고 오는 거야. 우강 도련님이 사, 상해로 떠났대. 상수 도련님도 곧 그리로 떠난댔어.”

한참 후 돌아온 분희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채 심부름을 하던 해주를 보며 주인어른이 넌지시 물었다.

“그래, 글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들었다. 참으로 기특하구나. 내가 주소를 적어주면 심부름 을 할 수 있겠느냐? 아무 눈에 띄지 않게 잘 전달해야 하느니라. 특히 일본 순사들에게는 붙잡히면 안 된다.”

“네, 잘 할 수 있어요.”

해주는 다부지게 대답하였다. 주인어른은 그 날부터 해주에게 무언가 귀중한 편지를 건네주며 주소를 일러주었다. 주로 명륜동에서 멀지않은 가회동, 팔판동, 옥인동, 효자동 , 안국동이나 광화문통에 사는 친척들에게 서찰을 전해주고 답장을 받아오는 일이었다. 옷자락 깊숙이 서찰을 넣고 집을 나설 때마다 해주는 마음이 뿌듯해져졌다. 잘 모르지만 주인어른이 자신을 믿고 맡긴 일이라고 여기자 한껏 자부심도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돌석이 바구니 가득 무, 고구마 같은 것들을 한 아름 들고 들어섰다.

“집안에 별일 없니? 지난번에 들렀더니 네가 어르신 심부름을 갔다고 하더구나. 너 주려고 작은 선물 하나 사왔는데. 누구한테 맡길까 하다가 괜히 쑥스러워서 저 쪽에다 두고 갔어.”

돌석은 쪽마루 기둥 밑에서 자갈로 눌러놓은 종이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해주는 떨리는 마음으로 종이를 끌러 보니 나비 모양의 분홍 꽃핀이었다.

“우와, 예쁘다!”

해주는 처음 받아보는 선물에 저절로 입이 벌쭉 벌어졌다.

며칠 후, 해주가 여느 때처럼 마악 사랑방 청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대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또 야마다 겐지라는 일본 순사가 찾아왔다.

“여기 이우강의 징병통지서를 가지고 왔소이다! 참, 아들 뿐 아니라 이 집 딸 이우미도 근로정신대로 데려갈 명령서를 가지고 왔지요! 그러니 어디로 빼돌릴 생각은 하지 마시오! 만약 내 말을 어길 때에는 천황폐하의 명령을 불복종한 죄를 크게 물을 것이오!”

“여보시오! 한창 공부할 학생들을 군대로, 정신대로 끌고 가는 게 천황폐하의 뜻이며, 대일본제국을 위하는 길이오? 내 아들 딸은 절대 보낼 수 없으니 그리 아시오!”

주인어른은 낮게 부르짖었다. 일본순사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갑자기 옆구리에 차고 있던 칼을 높이 빼들며 소리쳤다.

“이시창, 네 놈이 이래도 함부로 입을 놀릴 텐가? 이 건방진 조센징 같으니라고!”

일본 순사는 갑자기 옆구리에 차고 있던 곤봉을 꺼내어 마구 내리치기 시작하였다.

“으윽…….”

주인어른은 마당에 엎어진 채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안경은 벗겨져 내동댕이쳐지고 얼굴에는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있는데도 일본 순사는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 때였다.

“그, 그만 두시오!”

갑자기 주인어른의 둘때 아들 우빈이 달려 나와 일본 순사를 막아서며 소리쳤다.

“오라, 이렇게 힘이 장사인 걸 보니 네 놈도 전쟁터에 나가도 충분하겠구나!”

일본순사는 이번에는 우빈을 향해 마구 매질을 퍼부었다.

“나으리, 제발, 때리시려거든 이 몸을 때리시오! 어서!”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일본 순사를 막아섰다.

“너희들이 아예 죽기를 각오한 모양이렷다, 좋아, 이 달 말, 너희들을 굴비 엮듯이 몽땅 끌고 갈 터이니 그리 알라!”

일본 순사는 한동안 쓰러진 주인어른을 노려보다간 휙 돌아섰다.

그 날 이 후, 온 집안은 무덤 속처럼 조용하였다. 안방마님은 온몸이 부어오른 주인어른과 우빈을 위해 한약을 달이고, 아버지를 위해서도 몸에 좋다는 약을 내려주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주인어른은 사랑방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모두 안채로 건너오도록 하게.”

며칠 후 안방마님이 행랑채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해주는 엄마를 따라 조심조심 안채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주인어른이 안채 마당에 내려와 우뚝 서 있었다.

“어서 성냥을 가져오너라.”

우빈이 미리 준비를 한 듯 성냥통을 들고 나왔다. 주인어른은 성냥 한 개비를 꺼내어 칙 불을 켜서는 손에 들고 있던 누런 서류 뭉치에 다짜고짜 불을 붙였다. 낡은 서류는 불길이 닿자마자 하르르 금방 타들어갔다.

“잘 보아라, 이건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너희들의 노비문서이다. 너희의 할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지녀오던 서류들이다. 하지만 이제 이걸 다 태워버렸으니 너희들은 더 이상 노비가 아니라 자유의 몸이다!”

주인어른은 사랑채 식구들을 둘러보며 힘주어 말했다.

“네에? 그, 그게 무슨…….”

아버지를 비롯해 행랑채 식구들은 그저 어리벙벙한 얼굴로 말끝을 잇지 못했다.

“나는 내일 가솔 들을 이끌고 멀리 함경도 원산으로 갈 것이다. 그동안 아무도 몰래 논이며 밭을 다 팔아서 자금을 마련해왔다. 일본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어린 해주가 내 대신 그 일을 맡아주어 다 해낸 일이다. 이 집은 너희를 위해 그대로 두고 갈 것이니 서로 의지하며 살도록 하여라.”

주인어른은 아버지와 삼봉 아저씨, 분희에게 봉투 하나씩을 내밀며 목이 메어 말끝을 잇지 못했다.

이제 내일 새벽이면 안채 식구들이 모두 떠나는 밤이었다. 해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분희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분희가 짐을 싸고 있는 게 아닌가.

“해주야, 나도 어르신 따라 함경도로 가려고. 여기 있다간 나도 언제 정신대로 끌려갈지 모르잖아. 군수공장이나 방직공장, 병원, 신발공장으로 간 처녀들 중에는 멀리 전쟁터로 끌려가 일본 군인들을 위한 노리개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어.”

“아아, 언니까지 떠나면 나는 어떡하라고?”

해주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방으로 건너왔다. 그 때 아버지와 엄마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호롱불 밑에서 잔뜩 심각한 얼굴로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해주야, 우리도 주인어른을 따라 함경도로 가기로 했다. 함경도는 여기서 먼 곳이니 일본 놈들 등쌀도 덜 할 테고,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북간도가 멀지 않다니 여차하면 그리로 도망가서 살면 될 테고.”

“그게 정말이어요?”

해주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분희처럼 자신도 함경도로 떠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원산은 어디쯤일까? 거기가면 모두가 다 잘 살게 될까? 여기 경성처럼 무서운 일본 순사나 헌병도 없겠지? 우리가 떠난 걸 알면 돌석 오빠가 얼마나 슬퍼할까?’

해주는 어떻게든 돌석에게 자기가 주인어른을 따라 함경도 원산으로 떠나는 걸 알리고 싶었다.

‘옳지, 그래!’

해주는 호롱불 밑에서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주인어른을 따라 함경도 원산으로 간다는 편지를 써서 쪽마루 밑에다 몰래 숨겨 두었다.

이른 새벽,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식구들은 모두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주인어른과 안방마님, 우빈, 우미, 그리고 해주네 식구들과 분희, 모두 8명이었다.

‘아, 모두모두 잘 있어, 안녕!’

해주는 태어나서 주욱 살아온 명륜동 이 판서 댁의 날아갈 듯한 기와집을 뒤돌아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꺼번에 모든 사람이 움직이면 수상하게 여길 테니 식구들끼리 뿔뿔이 흩어져 경성역으로 모이도록 해야겠다. 강 서방은 식구들과 분희를 데리고 그리로 오게.”

주인어른은 만일을 위해 따로따로 가자고 하였다. 아버지는 주인어른이 시키는 대로 엄마, 해주, 분희를 데리고 소달구지 하나를 얻어 타고는 경성역으로 갔다. 대합실은 길 떠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였다. 주인어른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

“잘 들어라. 이제 우리는 곧 기차를 탈 것이다. 하지만 우린 원산이 아니라 신의주로 간다. 집안 귀신이 사람 잡아간다는 말처럼 일본순사들이 다그쳐 물으면 혹시나 남은 식구들이 행선지를 발설할 게 염려되어 그리 거짓말을 한 게다.”

‘뭐라고? 원산이 아니라 신의주라고? 그것도 모르고 거짓 편지를 썼다니!’

해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돌석이 뒤따라 원산으로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해주는 저절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저 머리에 꽂은 분홍 꽃핀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 때였다. 뒤따라 개찰구 쪽으로 나오던 주인어른을 일본 순사 둘이 나타나 덥석 붙잡으며 소리쳤다.

“이런, 불령선인께서 총독부의 허가도 없이 쥐새끼 같이 어디로 도망가시는 겐가?”

“나는 지금 식구들을 데리고 신의주 근처 용천에서 탄광을 하는 친지를 찾아가는 길일세. 지금 일본은 태평양 전쟁으로 석탄이며 철강 산업에 불을 켜고 있다 들었네.”

주인어른은 금방 정신을 차린 듯 침착하게 말했다.

“하하,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러 가는데 어찌하여 꼭두새벽에 숨어서 가는 게요? 아무튼 총복부에 보고를 해야 하니 당장 이리 나오시오!”

일본 순사는 주인어른 일행이 개찰구를 나가지 못하도록 자꾸만 드잡이를 하였다. 그 순간 제비처럼 날아갈 듯 검은 양복을 차려 입은 한 신사가 허둥지둥 개찰구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가만히 보니 주인어른의 사촌 동생인 이시경 남작이었다. 일본인에게 아첨을 하며 남작 지위를 받은 사람이라 주인어른이 집안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 사람이었다.

“이놈들, 우리 형님께서 지금 대일본제국을 위해 큰일을 하러 떠나시는데 너희가 감히 길을 막다니! 내 당장 총독각하에게 일러 너희를 엄벌에 처하라 이를 테다!”

이시경 남작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높이 치켜든 채 고함을 질렀다.

“나, 남작각하, 이시창이 지금 온 가족을 데리고 경성을 뜨려 한다는 정보가…….”

일본 순사는 쩔쩔매며 말했다.

“허허, 입 다물지 못할까? 형님, 먼 길 떠나시는 형님께 인사라고 하려고 나왔더니만 이런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것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시경 남작은 주인어른에게 통행증을 내밀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고맙네.”

주인어른은 짧게 인사를 하고는 곧 식구들을 이끌고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경성 역을 떠난 기차는 덜컹덜컹 하염없이 달려갔다. 개성을 지나 사리원,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는 거의 10시간이 걸린다고 하였다.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일행이 신의주 역에 내린 건 날이 어둑어둑해서였다. 신의주역 밖으로 나오자 나온 일행은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 떠난 지 몇 개월이 다 되어가는 우강이 눈앞에 떡 서 있었다.

“하하, 오느라 고생 많았다. 아버님, 어머님, 어서 저를 따라 오십시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마련해두었습니다. 강 서방과 아주머니도 어서 가시지요. 해주, 분희도!”

우강은 미리 준비해둔 수레에 식구들을 모두 태우고는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시장 근처에 있는 낡고 허름한 집이었다.

신의주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게 다 달라졌다. 이제 서울에서의 이 판서 댁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인어른과 안방마님이 같은 방을 쓰는 것부터가 그랬다. 소슬 대문이며 안채, 사랑채, 행랑채를 거느리던 명륜동 이 판서 댁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신의주에 온 지 며칠 지나자 주인어른이 우강과 나들이 차림으로 집을 나서는 게 보였다.

“한 며칠 어디 다녀올 데가 있으니 서로 의지하며 지내기 바란다.”

주인어른은 식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까만 무명 두루마기에다 두꺼운 모자를 푹 눌러쓴 낯선 차림새였다. 우강도 진한 밤색 양복에다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면 돌아온다던 주인어른과 우강은 집을 떠난 후 해가 바뀐 후에야 바짝 여윈 몸으로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주인어른을 찾는 젊은이 둘이 대문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연방 대문 밖을 살폈다.

손님들은 한동안 주인어른과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갔다.

다음 날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일본 경찰들이 시장통에 있는 집으로 쳐들어왔다.

“이시창, 당장 끌어내! 쥐새끼 같은 놈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테니 샅샅이 찾아보고!”

일본 경찰들은 우르르 달려들어서는 온 집안의 물건을 마당에다 팽개치고 서책들을 모두 내던졌다. 그러고는 주인어른을 비롯하여 안방마님, 그리고 우빈과 우미, 엄마 아버지, 해주, 분희까지 모두 강제로 끌어내어 마당에 무릎을 꿇려놓았다.

“네, 이놈들! 어쩌자고 죄 없는 사람들을 이리 괴롭히는 게냐?”

주인어른이 호통을 쳤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허리춤에 찬 곤봉으로 주인어른을 후려쳤다.

“입 닥치지 못할까? 네 놈이 대일본제국을 향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아나? 며칠 전에 경성에서 온 젊은 청년 두 명이 신의주로 잠입했다는 정보가 날아왔다. 그 놈들이 네 놈을 찾아온 게 틀림없으렷다! 네 놈이 논밭을 팔아 마련한 자금을 그 놈들을 시켜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것도! 물론 네 놈 아들 이우강이 전달책이라는 것도! 여봐라, 당장 이 늙은이를 경찰서로 데려가지 못할까!”

일본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주인어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러다가는 갑자기 분희를 뱀처럼 징그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옳아, 그렇잖아도 요즈음 군수공장에서 일할 일손이 필요한 때에 너희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해야지!”

일본 경찰은 이번에는 분희를 향해 다가오더니 왁살스레 손을 비틀고는 끌고 나갔다.

“싫어요, 안 가요, 안 가! 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 어서요!”

분희가 울며 매달렸지만 일본 경찰은 이제는 봐주지 않으려는 듯 질질 끌며 나아갔다.

“아이고, 나리, 제발, 제발, 그 애를 놔주십시오! 그 애는 제 딸입니다요, 어서, 그 애를 놓아주십시오! 그 대신 제가 무슨 일이라도 다 하겠습니다요!”

아버지가 나서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사정하였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그 날 이후, 끌려간 주인어른은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대주었다는 이유로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얼마 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얼마나 고문을 받았는지 주인어른은 이미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반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당에서 탕약을 달이고 있던 해주는 주인어른이 찾는다는 말에 깜짝 놀라 안으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는 우빈도 나와 있었다.

“……지, 지난번에 경성에서 나를 도와 준 것처럼 이번에도 나를 도와다오. ……너희들이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그, 그동안 나는 독립지사들에게 독립자금을 전해주는 일을 맡아왔다. 이번에는 내 대신 너희가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으로 가서, 다시 배를 타고 중국 상해까지……독립자금을 전해주는 힘든 일이다.”

“…….”

해주는 차마 대답을 못한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어린 너에게 무리한 부탁인 줄 잘 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독립지사들은 이미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상해로 갈 수가 없느니라. ……하지만 정 두렵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마. 우빈이 혼자 보내던가.”

주인어른은 우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우빈은 ‘제발, 나랑 같이 가주렴!’하는 눈빛으로 해주를 바라보았다. 해주는 만석꾼이던 주인어른이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 붓고, 일본경찰에 끌려가 반죽음이 되도록 고문을 당하고 온 모습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다. 게다가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 수조차 없는 분희를 떠올리자 가슴에는 분노가 치솟았다.

“아니어요, 저도 가, 갈게요. 가겠어요.”

해주는 서둘러 대답했다.

“부디, 몸조심 하여라. 무슨 일이 있어도……꼭 살아서, 살아서 우리나라를 되찾는 걸 보기 바란다, 꼭! 나, 나도 몸이 낫는 대로 곧 너희 뒤를 따라 갈 것이다.”

다음 날 새벽 주인어른이 문턱까지 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간신히 배웅을 해주었다.

해주는 짧은 깡통 치마에 저고리를 입고, 우빈은 바지에다 단추가 목에 까지 달린 두꺼운 셔츠를 입었다. 해주도 우빈도 옷 속에 돈을 넣은 전대를 단단히 꿰맨 채였다.

아버지는 해주와 우빈를 압록강 하구에 있는 삼도랑두 나루터로 데리고 갔다. 누군가 우거진 수풀 사이로 손전등이 반짝 신호를 보내왔다. 어둠 속에서 거룻배 한 척과 뱃사공 이 보였다.

“허허, 내 오늘까지 숱한 독립군들을 이 배에 태워 안동까지 데려다 줬다만 너희처럼 어린 독립군들은 처음이로구나.”

뱃사공 할아버지는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마침내 배가 중국 국경 근처의 한 강기슭에 닿자 누군가가 조심조심 거룻배를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는 너희들을 안내할 이영훈이라고 한다. 그냥 삼촌이라고 부르렴.”

해주와 우빈은 이미 신의주에서 들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고 그를 따라 나섰다.

“누가 묻거든 너희 둘은 상해에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남매라고 하여라. 나는 이제 여기서 너희들과 헤어져야 한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너라.”

상해 항에 닿자 이영훈은 말을 마친 후 마치 누가 볼세라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해야 해. 나를 따라 와.”

우빈은 진짜 오빠처럼 해주의 손을 붙잡고는 천천히 개찰구를 지나 상해로 떠나는 ‘프린스’호에 올라탔다. 마침내 배가 서서히 항구를 떠나자 해주는 문득 배를 타고 사흘 밤낮을 가야 상해가 나온다고 했던 이영훈의 말이 떠올랐다. 배 멀미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자 우빈은 해주를 데리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갑판에 주저앉아 간신히 몸을 가누고 있는 해주와 우빈에게 콧수염을 단 젊은 아저씨가 다가와 웃음을 띤 채 물었다.

“너희들, 조선 아이들이지? 그래, 어디 가는 길이니?”

“그건 몰라요. 상해에 도착하면 아버지가 저희들을 데리러 오시기로 했거든요.”

해주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쌀쌀맞게 말했다.

“상해는 아주 넓고 번화한 도시란다. 눈 뜨고 코 베어가는 곳이지. 정신 단단히 차리고 다녀야 한다.”

콧수염 아저씨는 인자하게 일러주었다.

마침내 길고 긴 항해가 끝나고 상해에 닿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짐을 들고 갑판으로 몰려나왔다. 그때 총칼을 찬 일본 순사 서너 명이 사진을 든 채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조사하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사진 속의 사람을 찾는 게 분명했다.

‘어쩌지? 설마 우릴 찾는 건 아니겠지?’

해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여기서 잡히면 모든 게 다 끝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해주와 우빈 곁에 서 있던 콧수염 아저씨가 손에 든 검은 색 가방 하나를 재빨리 우빈에게 내밀며 낮게 속삭였다.

“이걸 꼭 이우강에게 전해 다오. 사실 나는 네가 우강의 동생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상해에 가는 길에 아무도 몰래 너희들을 보호해주라는 명령을 받았지. 지금 저기 있는 일본비밀 경찰들이 나를 찾고 있는 듯 보이니 부디 이걸 형에게 전해다오.”

콧수염 아저씨는 미처 해주와 우빈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훌쩍 갑판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본 경찰을 피해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앗, 저, 저 놈이다, 저 놈이야!”

일본 경찰들은 총을 겨눈 채 후다닥 콧수염 아저씨를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콧수염 아저씨는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제 저 아저씨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마 경찰서로 끌려가서 고문을 받겠지. 무사히 풀려나면 좋을 텐데. 아무튼 우린 어서 여길 빠져나가자!”

일본 경찰이 콧수염 아저씨를 붙잡아가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해주와 우빈은 무사히 배에서 내려 대합실로 들어섰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마중을 나오기로 한 우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해주와 우빈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대합실을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우강은 한 시간, 두 시간 몇 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해주와 우빈은 오도 가도 못한 채 하염없이 우강을 기다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둘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어서 일어나, 네가 우빈이고, 네가 해주 맞지?”

놀란 눈으로 바라보니 목까지 단추가 달린 중국옷을 입은 남자 아이가 서 있었다.

“난 장은중이야. 너희들을 데리러 심부름을 왔단다. 너희 형은 지금 주가각에 있는 중국인 왕 선생님 댁에 숨어 있어. 참, 여기 있는 편지 보여줄게.”

은중이라는 아이는 땟자국이 줄줄 흐르는 옷소매에서 편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어서 가자. 형 편지를 보니까 믿을 수 있는 아이일 거야.”

우빈이 해주를 다독이며 콧수염 아저씨가 준 가방이며 보따리를 소중하게 든 채 은중이를 따라갔다. 버스를 타고, 다시 또 배를 타고 구불구불 물길이 이어진 마을로 들어서자 마침내 하얀 회벽을 칠한 집이 나타났다.

“어서 오너라! 너희가 여기까지 와 주다니 참으로 장하구나, 장해!”

우강은 해주와 우빈을 두 팔을 벌려 한꺼번에 힘껏 안아주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중국옷을 입은 노인 한 사람과 몇몇의 젊은 남자들, 단발머리를 한 젊은 여자가 탁자 앞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하하하, 꼬마 독립군들이 왔구나! 잘 왔다, 잘 왔어!”큰 소리로 외치는 그 아저씨는 바로 분희를 좋아하던 김상수였다.

“하하, 나를 알아보겠니? 그래, 분희는 잘 있느냐? 여보게, 우강, 자네 동생들이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김상수는 연방 칭찬을 해주었다.

“부, 분희언니가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갔어요.”

“그게 정말이냐? 망할 놈들! 조선의 처녀들을 제 놈들 멋대로 끌고 가다니!”

김상수는 책상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했다.

그때 우빈이 먼저 보따리에 꼭꼭 싸 들고 온 가방을 내밀었다.

“형, 배에서 만난 어떤 콧수염 아저씨가 형에게 이걸 전해주라고 했어. 그런데 그 아저씨가 일본 사람한테 붙잡혀서 끌려가는 걸 봤어.”

우빈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단다. 형과 함께 일하는 이해준이라고 한다. 부둣가에서 도망가다가 잡혀 경찰서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우리가 숨은 곳을 밝히지 않자 신의주 형무소로 끌고 갔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살아남기 힘들게다.”

우강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우강이 가방 안에서 헝겊으로 둘둘 만 물건을 펼치는 순간 해주는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 그건 바로 일본 순사들이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의 권총 몇 자루가 들어있었다.

“정말 수고했다. 너희가 가져온 귀한 돈과 편지, 권총은 이제 곧 우리가 중경으로 가져갈 것이다.”

우강은 거듭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 날 신의주로 떠나려던 해주와 우강은 주가각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일본경찰이 상해의 모든 항구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 옴짝달싹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상해로 돌아갔던 은중이 다시 슬픈 소식을 전해왔다.

“뭐어? 아, 아버님! 아버님이 기어이……으흐흑…….”

우강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오열하였다.

‘아, 주인어른이 돌아가셨구나! 까막눈이던 내 눈과 귀를 열어주신 분! 마지막 힘을 내어 나와 우빈 도련님에게 심부름을 보내셨던 거구나. 이게 주인어른이 시킨 마지막 심부름이었다니!’

해주의 두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그날 밤, 왕 선생이 마련해준 빈소 앞에서 우강과 우빈, 해주는 술잔을 따르고 절을 올렸다. 며칠 동안 왕 선생의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천군만마와 같은 주인어른을 잃은 슬픔을 안으로 삭이고 있었다.

일주일쯤 지나자 김상수와 단발머리 강이 언니가 머뭇머뭇 말했다.

“우강동지, 우리가 여기 더 이상 남아있다간 위험해요. 언제 일본 비밀경찰이 냄새를 맡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래, 어르신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 없네. 어서 중경으로 돌아가세.”

“그래, 아버님이 마련한 이 귀한 자금을 일본 놈들에게 뺏길 수는 없지. 그런데 우빈아, 해주야, 너흰 여기 남아 있다가 조용해지면 다시 신의주로 돌아가렴.”

그 때였다. 우빈이 그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듯 말했다.

“형, 나도 형하고 같이 중경으로 갈 거야. 그래서 나도 형처럼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

“그건 안 된다. 중경은 아주 위험한 곳이다. 중국군의 수도가 그곳에 있어서 언제 어느 때 일본군이 물밀 듯 밀려올지 모르거든. 그러니 어서 해주와 함께 신의주로 돌아가렴.”

“저도 중경으로 가겠어요. 주인어른의 뒤를 이어 저도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어요.”

해주도 옆에서 다부지게 말했다.

“우강 동지, 그래요, 이 아이들은 이미 독립군이어요. 임시정부에서도 무슨 일이든지 척척 해낼 거예요. 자, 얘들아, 어서 떠날 준비를 하렴, 어서 가자!”

며칠 동안 해주와 우빈을 돌봐 준 강이 언니가 말했다.

마침내 길을 떠난 일행은 밤이 되면 길에서 한뎃잠을 자기도 하고, 때로는 중국인 집에 들어가 밥을 끓여먹으며 상해를 지나 남경, 한구로 이어지는 첩첩산중으로 들어섰다. 상해를 떠나온 지 벌써 사흘이나 되었지만 중국 땅은 어찌나 큰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장강을 거슬러 중경까지 가는 거란다. 지금 중경으로 가는 육로는 일본군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어서 이 길이 더 안전하단다.”

우강은 한구라는 곳에서 나루터 쪽으로 갔다. 배는 일행을 태운 채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협곡을 지나고, 어느 때는 바다처럼 강폭이 넓은 곳을 지나는 둥 중국 내륙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 배가 협곡을 빠져나와 벌판처럼 넓은 곳으로 나왔을 때였다.

“드디어, 다 왔다! 저 쪽이 바로 중경이란다!”

우강이 반갑게 소리를 질렀다. 일행은 모두 배에서 내려 트럭을 빌려 타고는 제일 먼저 임시정부청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먼 길 오느라 모두 수고가 많았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푸른색 중국 두루마기에다 동그란 안경을 낀 어르신이 나와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람들이 상해에서부터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선생이라고 낮게 속삭이며 허리 굽혀 인사를 하였다. 그 때 사람들을 맞이하던 김구 선생이 해주와 우빈 곁으로 다가왔다.

“너희가 바로 우리 임정을 위해 그 험한 길을 군자금을 가지고 온 어린 독립군들이로구나. 이 시창 선생 덕분에 그동안 우리 임정 식구들이 마음 놓고 독립을 위해 일 할 수 있었는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김구 선생은 눈시울을 붉혔다.

해주와 우빈은 독립지사들이 모여 사는 토교한인촌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우강이 토교한인촌으로 찾아와 해주에게 말했다.

“해주야, 내일 임시정부 요원 한 사람이 경성으로 떠난다. 네가 그 사람을 도와 함께 가주면 어떻겠니? 중국인 부녀처럼 꾸미고 가면 의심을 받지 않을 듯 해서 그러는 게다.”

“겨, 경성이라고요?”

해주는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힘들게 중경까지 왔는데 또 다시 경성으로 가라니!

“그래, 이번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란다. 서울 가회동에 있는 애국지사, 이동우 선생에게 보내는 밀서를 전달하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

“이동우 선생님이라고요? 저도 알아요. 주인어른의 심부름으로 몇 번이나 그 댁엘 드나 들었는걸요. 제가 갈게요! 주인어른께서 아시면 기뻐하실 테니까요.”

해주는 가회동 이동우선생도 주인어른처럼 만석꾼 집안으로 온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내놓은 훌륭한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맙다, 고마워! 넌 누구보다 영리하고 당차서 잘 해낼게다. 너를 믿는다.”

우강은 낯빛이 환해진 채 칭찬을 해주었다.

‘그래, 이번에 가면 경성으로 다시 돌아가셨다는 안방마님이랑 우미 언니도 만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분희 언니도 명륜동 집에 와 있을지 모르고. 맞아, 돌석 오빠도 보고!’

해주는 갑자기 마음이 들떴다.

다음 날 새벽 강이 언니가 해주에게 중국인 소녀처럼 치파오를 입히고 머리도 한 갈래로 묶어 길게 땋아주었다. 해주는 가지런하게 땋은 머리 한 쪽에 분홍 꽃핀을 꽂았다.

해주와 함께 떠날 사람은 바로 김상수였다. 김상수도 어느 틈에 중국인 옷을 입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도록 콧수염까지 달았다.

“해주야, 이제 너와 나는 한 운명이다. 우리 잘해보자. 참 이 편지는 네가 지니고 가도록 하렴. 내가 가지고 있다가 들키면 큰일이니까.”

“네.”

해주는 편지를 허리춤에 단 주머니에 단단히 넣으며 힘주어 대답했다.

해주는 김상수를 따라 다시 또 상해를 거쳐 경성으로 가는 긴 여정에 올랐다. 이번에는 일본 경찰들이 항구마다 지키고 있어서 중경에서 무한을 거쳐 남경, 상해까지 육로를 간다고 하였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하염없이 달려갔다. 해주는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지독한 차멀미와 중국인 특유의 기름진 냄새 때문에 뱃속에 든 똥물까지 다 토해낼 정도였다.

“조금만 참아라. 무한에 도착하면 시원한 얼음물을 사주마.”

김상수는 안타까운 듯 해주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런데 버스가 한참을 달려 어느 산모퉁이를 지나갈 때였다. 갑자기 길 가에 일본군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산길에서 이제 어떡하지?’

해주는 저절로 가슴이 쿵쾅쿵쾅 거렸다. 김상수도 금방 얼굴빛이 하얗게 질린 채 당황해하는 모습이었다. 버스가 멈춰 서자 일본군이 총을 겨눈 채 버스에 올라타더니 한 사람씩 내리도록 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버스에서 내렸다.

해주도 눈을 내리 뜬 채 조심조심 버스에서 내렸다. 그때였다. 한참을 이 사람 저 사람을 살피던 일본군 하나가 갑자기 김성수를 향해 총을 겨눈 채 소리쳤다.

“어이, 이 놈 아무래도 수상하다! 이리 끌어내!”

“무슨 소리! 나는 아무 죄가 없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김상수는 서툰 중국말로 당황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또 다시 몇 사람을 잡아내더니 자신들이 타고 온 트럭에 태웠다. 그러다간 갑자기 해주를 보며 느물느물 웃으며 다가왔다.

“오라,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여기 있었군! 우리 대일본제국에서 꼭 필요한 아가씨가 아닌가! 자, 어서 이 처녀도 트럭에 태워!”

“안 돼요, 안 돼!”

해주가 마구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트럭은 해주와 김상수, 몇몇 젊은이들을 태운 채 꼬불꼬불 산길을 지나 더욱 험한 산으로 들어가는 게 아무래도 일본 군부대가 있는 곳으로 가는 듯 보였다.

“이제 큰 일 났구나. 어떻게든 여기서 도망을 가야 할 텐데.”

김상수는 달리는 트럭에서 뛰어내릴 듯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해주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는 듯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트럭이 끼이익 급정거를 하는 순간 숲 속에서 탕탕 총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을 끌고 가던 일본군들도 트럭에 몸을 숨긴 채 숲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았다. 놀랍게도 일본 군인들이 하나 둘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살아남은 일본군 서너 명이 마구 달아나는 게 보였다. 그제야 숲에 있던 군인들이 하나 둘 트럭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우린 지금 일본군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근처 부대에서 달려온 한국광복군들입니다.”

“세상에, 우릴 구해준 사람이 광복군이었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우리 모두 일본군에게 끌려가 죽을 뻔했는데 말이오. 나는 지금 임시정부의 일로 서울로 가던 길이었다오.”

김상수가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그 때였다. 해주 옆으로 군인 하나가 다가왔다. 그 군인은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 해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간 간신히 입을 뗐다.

“해, 해주야! 너 해주 맞지? 그렇지? 나야, 나, 최돌석!”

“아니, 도, 돌석 오, 빠……?”

해주는 그 순간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누르스름한 군복을 입고 있는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최돌석이었다.

해주는 낯선 중국 땅에서 돌석을 만나자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일본군이 뒤 따라 올지 모르니 빨리 여길 떠나야 하오. 어서 우리를 따라 부대로 갑시다.”

계급이 높은 군인 하나가 김상수와 해주에게 일렀다. 함께 잡혀온 중국인들은 서둘러 갈 길을 가고, 해주와 김상수는 광복군이 타고 온 트럭을 타고 근처 부대로 향했다.

“나는 네가 주인어른을 따라 원산에 있는 줄만 알았는데. 나는 그 후 중국에 가면 광복군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리로 온 거야. 그런데 너는?”

돌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해주를 보고 또 보았다.

해주는 그동안의 일들을 모두 들려주었다.

“그랬구나! 난 처음에는 네가 중국 아이인줄 알았어. 그런데 머리에 꽂은 분홍 꽃핀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그걸 여태 가지고 있다니!”

돌석은 해주를 만난 놀라움에 어쩔 줄 몰랐다.

“오빠는 여기서 일본군과 싸우는 거야?”

“그래. 하지만 곧 멀리 떠날 거야. 지금 미국 영국 등 연합군들이 힘을 합해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단다. 우리 광복군들도 연합군을 도우려 인도. 버마 전선으로 갈 거야. 거기서 일본군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고 포로도 심문하는 등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될 거래.”

경성에서 일본 순사에게 똥바가지를 퍼부을 정도로 담력이 큰 돌석은 어느 틈에 누구보다 용감한 군인이 되어 있었다.

‘돌석 오빠, 무사히 다녀오기 바래. 우리 경성에서 꼭 다시 만나자.’

해주는 연병장에서 한참 훈련을 하는 광복군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광복군이 내준 지프차를 타고 큰 길까지 나온 해주와 김상수는 물줄기를 따라 강기슭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거기서 간신히 배를 얻어 타고는 장강을 거슬러 상해로 갔다.

“휴우, 다행이구나. 여기까지는 무사히 잘 왔다. 이제 인천으로 가는 배표를 구해서 무사히 경성으로 가야할 텐데.”

김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표를 구하러 대합실로 들어갔다. 그 때였다.

“저기, 저 놈이다! 저 어린 계집애도 일행이다!”

어디엔가 숨어있던 일본 순사들이 우르르 나타나며 소리쳤다. 그 순간 해주는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마구 도망을 갔다.

“해, 해주야, 제발, 그 펴, 편지를……없애야…….”

김상수는 일본 순사들에게 끌려가며 신음소리를 냈다. 해주는 마구 달려가면서 어느 틈에 주머니 안쪽에 있는 밀서를 꺼내어 마구 찢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순사가 다가오자 얼른 입안에 꾸역꾸역 꾸겨 넣었다.

“에잇, 이 쥐새끼 같은 년! 당장 이 년을 끌고 가!”

일본 순사 하나가 방망이로 해주의 등짝을 후려치며 명령했다.

“으윽!”

해주는 등짝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입안에 든 편지 조각을 다급하게 어금니로 질겅질겅 씹었다. 이제 일본 순사가 입안에 든 편지를 꺼낸다 해도 글씨를 알아보기는 힘들 터였다.

“지독한 년, 어서 저 년 아가리를 벌리고 그 안에 든 걸 꺼내봐.”

일본 순사 하나가 해주에게 다가와 우왁스레 손가락으로 입을 벌렸다. 그 순간 해주는 일본순사의 손가락을 꽉 깨물었다.

“으으윽, 이, 이년 좀 봐라!”

약이 오를대로 오른 일본 순사가 해주의 머리채를 잡고는 마구 흔들었다. 그 바람에 해주의 머리에 꽂혀있던 분홍 꽃핀이 떨어지고 말았다. 분홍 꽃핀은 어느 새 일본순사의 구두 밑창에서 다 부서졌다.

“……저, 저…….”

해주는 질질 끌려가면서도 부서진 분홍 꽃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주와 김상수는 그 길로 배 밑창에 갇힌 채 경성까지 왔다. 그리곤 재판도 받지 않은 채 곧바로 서대문 형무소 취조실로 끌려갔다. 독립지사들을 경찰서로 끌고가 취조한 후 다시 감옥으로 끌고 오는 번거로움을 피하려 아예 형무소에다 취조실을 만든 거였다.

“네 이름이 강해주, 맞지? 그래, 누구의 명령을 받고 무슨 일로 중경에서 경성으로 들어오려 했는지 말하렷다. 김구가 보냈느냐?”

금테 안경을 낀 형사가 해주를 노려보며 물었다.

“나는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았어요. 나는 중국에 사는 친척집에 갔다가 오는 길이어요. 김구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걸요!”

해주는 약간 모자라는 아이처럼 어눌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형사는 이미 해주가 이시창 어른 집의 몸종이었으며, 이시창 어른을 따라 신의주로 간 것까지 다 꿰고 있었다.

“바른대로 대지 못할까? 그럼 이우강이 시켜서 왔느냐? 경성에서 누굴 만나라고 하였지?”

“몰라요, 우강 도련님이 어디 계신데요? 몇 년 동안 본 적이 없는 걸요.”

해주는 모든 질문에 모르쇠로 대답하였다.

“이런 지독한 년! 너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군. 내가 바로 독립군 잡는 고등계 악질형사 스즈키라는 걸 모르느냐? 내 손에 걸린 독립군치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오냐, 너도 어디 매운 맛 좀 봐야겠구나!”

스즈키 형사는 갑자기 해주의 머리를 양동이에 처박았다가 꺼내더니 매운 고춧가루를 콧 속에 퍼부었다.

“으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해주는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계속된 질문에도 해주는 이를 악물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스즈키 형사는 분이 안 풀리는지 옷을 벗긴 채 마구 채찍질을 하고, 몽둥이질을 하였다.

“어서 말해, 누가 너에게 무슨 임무를 맡겼지?”

“그…… 그런……일……없습니다…….”

해주는 가물가물 정신을 잃어가면서 중얼거렸다.

“이런 지독한 것들! 김상수 그 놈처럼 이 년도 독종이구먼, 독종이야!”

스즈키는 침을 퉤 뱉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 다행이다. 김상수 아저씨도 입을 열지 않았어! 그래, 나도 결코 말하지 않을 거야. 나 혼자 당하면 돼.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다치게 할 순 없어.’

해주는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걸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해주가 사실을 털어놓는 순간 우강과 임시정부, 그리고 가회동 이동우 선생은 물론 그 집안이 풍비박산 날 게 뻔했다.

“……으으…….”

해주는 찢어진 입술사이로 또 다시 고춧가루를 쏟아 붓는 걸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스르륵 정신을 잃었다. 그 후에도 스즈키를 비롯한 다른 경찰들도 돌아가면서 해주를 고문하였다. 그들은 해주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매질을 하기도 하고, 물이 담긴 양동이에 머리를 처넣었다. 해주는 이제 반항 할 기운도, 비명을 지를 기운도 없었다. 온 몸이 찢어지고 멍들고 마비가 되어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지만 그럼 너무 억울하잖아. 주인어른이 언젠가는 꼭 내 나라를 되찾는 걸 보라고 하셨는데……그걸 못보고 죽으면 너무 분하잖아……. ’

해주는 아무리 잠을 자지 않으려 해도 잠이 쏟아졌다. 눈을 감으면 죽을까봐 겁이 나서 눈꺼풀을 치뜨고 참으려 애를 써도 자꾸만 눈이 감겼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자꾸만 해주를 불렀다.

“해주야, 해주야, 어서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서 일본이 망하고 우리나라가 독립되는 걸 봐야지. 어서, 눈을 뜨렴, 어서! 너는 누구보다 용감하고 씩씩한 어린 독립군이 아니더냐? 그깟 고문에 쓰러지면 안 돼지, 어서!”

그 소리는 어딘가 귀에 익었다.

“……주인어르신? 주인 어르신 목소리야. ……주인어르신이 나를 찾아오셨어!”

해주는 귓가에 들리는 정겨운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떴다. 무언가 하얀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연기처럼 스르륵 손바닥만한 창살 사이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주인어른의 목소리를 들은 그 이후 해주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죽는 건 억울한 일이야. 살아야 해. 아무리 놈들이 나를 짓밟아도 난 살아날 거야. 주인어른도 꼭 살아서 이 나라를 되찾는 걸 보라고 하셨잖아. 꼭 그래야 해.’

해주는 차가운 감옥 바닥에 쓰러진 채 조그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한 줄기를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 후에도 일본 경찰들의 고문은 수시로 이어졌다. 하지만 해주는 이를 악물고 버티고 또 버텼다. 정신을 잃고 까무러쳤다가도 또 다시 정신이 들면 속으로 다짐하였다.

‘그래, 네 놈들이 아무리 나를 윽박지르고 고문해도 나는 입을 열지 않을 거야. 나는 비록 힘이 없지만 그분들은 오래오래 살아서 네 놈들 손에서 내 나라를 되찾아야 하니까.’

해주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해주는 누군가 면회를 왔다는 말에 다리를 질질 끌며 면회실로 갔다. 어떻게 알았는지 엄마 아버지, 그리고 안방마님이 와 있었다.

“부디 조금만 견뎌라, 조금만 더. 지금 아무래도 일본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연합군이 조만간 일본에 공습을 퍼부을 거라는 소문도 있고. 우강이, 우빈이는 다 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강이가 연락을 해주어 이렇게 달려온 게다.”

“……기, 김상수 아, 아저씨는요……?”

해주는 함께 끌려온 김상수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며, 며칠 전에, 고문을 받고 쓰러져서는 결국……세상을 떠났단다…….”

안방마님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아, 아저씨……. 분희 언니만 보면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던 아저씨였는데……. 분희 언니는 이것도 모른 채 지금쯤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아아, 아저씨!’

해주의 두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루하루 죽은 듯 시간이 지나갔다. 어찌된 일인지 그토록 닦달을 하던 일본 경찰은 며칠 째 취조를 멈추고 해주를 부르지 않았다. 해주는 벽에 기대어 앉아 감옥에서 나오는 주먹밥에 소금국을 먹으며 멀거니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조선인 간수가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느닷없이 감방 문을 열어주며 소리쳤다.

“어서, 어서 나와라, 어서! 일본이 망했다! 일본이 항복을 했어!”

“……네에?”

해주는 너무나 갑작스런 소식에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다. 그 순간 형무소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감방을 뛰쳐나와 울부짖으며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대한독립만세라고? 그렇다면 정말 일본이 망한 걸까? 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토록 기다리던 그 날이 온 거야! 내 나라를 되찾은 그 날이 온 거야!”

해주도 그제야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간신히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자 어느 틈에 찾아온 가족들로 형무소 마당은 발 디딜 데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오늘이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는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세!”

누군가가 해주의 손에도 태극기 하나를 쥐어주었다.

“아아, 이제 모두 돌아오겠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돌아올 거야! 연합군과 함께 멀고 먼 전선으로 떠난 돌석 오빠도, 그리고 어딘가로 끌려간 분희 언니도! 우강, 우빈 오빠도! 멀리 중국 땅에 숨어살던 사람들도 다 돌아올 거야! 저 하늘 어딘가에서 주인어른도, 김상수 아저씨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겠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애쓰다 돌아가신 이름 없는 모든 사람들도!”

해주의 두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저만치 사람들을 헤치고 엄마 아버지, 안방마님, 우미언니가 허둥지둥 뛰어오는 게 보였다.

해주는 무수히 나부끼는 태극기의 물결과 대한독립만세를 들으며 절뚝절뚝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그들을 향해 마구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