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고등어

"칼치, 고등어, 오징어, 싱싱한 생선 왔습니다. 두 눈이 말똥말똥한 생선 왔습니다. 자!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자갈치에서 금방 실어온 싱싱한 생서-언 있습니다."
해질 무렵 아파트 한 귀퉁이에서 낡은 스피커가 징징 울었습니다.
생선장수의 작은 트럭 꼭대기에 매달린 스피커였습니다.
"칼치, 고등어, 오징……."
스피커에서는 똑같은 목소리가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소리 주인공인 생선장수 아저씨는 심심했습니다. 땅거미가 스멀스멀 기어오는데도 손님이 영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한 날이네. 가을철에는 싱싱한 칼치, 고등어 오징어가 제격인데…… 구워도 좋고, 무를 설겅설겅 썰어서 찌개를 만들어도 일품인데, 모두들 뭘 모르는 모양이야.'
마음이 급해진 아저씨는 삐뚜름하게 쓴 모자 창을 치켜들면서 높고높은 아파트를 쳐다보았습니다. 아파트 칸칸에 꼭꼭 숨어서 못들은 체하는 사람들이 야속했습니다.
"이렇게 싱싱한 생선을 몰라주다니……."
아저씨는 섭섭한 마음으로 생선들을 쭈욱 둘러보다가 상자 한가운데 반듯하게 누워 있는 고등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유난히 몸집이 크고 눈동자가 반들거리는 녀석이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녀석이 큰눈을 반짝거리며 생선장수를 불렀습니다.
"어라, 이 녀석 봐라?"
심심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듯이 아저씨는 손가락 하나로 고등어 배를 슬쩍 찔렀습니다.
"아야야!"
녀석이 엄살을 부렸습니다.
"이 녀석아, 안 그래도 장사가 안돼서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무슨 일이냐?"
"아저씨는 참 나쁜 사람이지요?"
"나쁜 사람이라니! 나는 아닌데!"
아저씨는 기분이 슬슬 나빠졌습니다.
"바다에서 잘 살고 있던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나쁜 사람이지요."
"그게 왜 내 탓이냐? 너희들을 잡은 어부 탓이지."
"그렇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저씨가 착한 사람이라면 우리를 이렇게 넣어놓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에 누군가가 아저씨를 잡아서 이렇게 상자 속에 넣어 팔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저씨는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네 말도 맞네. 그러나 어쩔 수가 없구나. 나는 너희들 목숨과는 관계도 없을 뿐더러 너희들을 돈으로 바꾸어야 우리 식구들을 먹여살릴 수 있단다."
"그것이 바로 아저씨의 나쁜 점이에요. 남이야 어떻게 되든말든 자기만 살겠다는 생각 아니에요? "
"아니지, 너는 어차피 죽어있는 몸이잖아. 내가 누군가에게 너를 팔지 않으면 너는 그냥 썩어버릴 수도 있어. 안그래?"
'…….'
고등어는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러나 고등어는 정말 다시 살아서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와! 싱싱한 고등어다! 아저씨, 저 고등어 한 마리만 주세요."
언제 왔는지 얼굴이 예쁜 아이 손을 잡은 아주머니가 커다란 고등어를 가리키며 고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이구, 예, 예. 아주 싱싱하지요. 금방 가져와서 아주머니가 첫손님이에요. 그냥 드릴까요, 토막을 내 드릴까요?"
'맙소사! 나를 토막내다니!'
고등어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주세요."
"예, 예. 그러지요."
아저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까만 비닐봉지에 고등어를 담아주었습니다.
'세상에, 세상에'
고등어는 기가 막혔습니다.
'이제까지 착한 척 다정하게 이야기하던 아저씨가 이렇게 나를 비닐봉지 속에 처 넣다니, 이제는 정말 구이나 찌개가 되러 가는구나.'
고등어는 아주아주 슬펐습니다. 치거덕치거덕 까만 봉지에 담겨서 흔들려 올 동안 내내 울었습니다.
"아빠가 좋아하시는 생선이야. 아빠는 고등어 구이를 좋아하시지."
아주머니가 흐르는 물에 고등어를 씻으며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저도 좋아하지요."
아이가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깨끗하게 씻은 고등어를 도마 위에 얹었습니다. 꼬리를 자르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들어내기 위해서지요.
"안돼요, 안돼요."
고등어는 애절한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안되긴 뭐가 안된단 말이야!"
아주머니는 누구의 말인지도 모르면서 무심코 말했습니다.
"나를 자르면 안된단 말이에요."
"어머니, 고등어가 말을 하고 있어요. 저것 보세요. 동그랗게 뜨고 있는 눈에 눈물이 고였어요. 고등어가 울고 있는 거예요."
"얘는, 고등어가 어떻게 말을 하겠니 그것도 죽은 고등어가."
"아주머니, 제가 말하는 게 맞아요. 저는 다시 바다로 가고 싶어요."
"에이구머니나!"
아주머니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정말이에요. 아주머니."
고등어는 더 애절한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어쩌겠니 고등어야. 너무 늦었잖니? 그런 말은 바다에서 잡힐 때 어부에게 했어야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건요, 지금의 제 마음이에요."
고등어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고등어 말을 들어주세요. 너무 불쌍해요."
"불쌍해도 어쩌겠니. 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아."
찌리리링.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 정임이니? 이게 얼마만이니? 졸업하고 첨이지?"
아주머니의 긴 전화 통화가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이 아이는 도마 위에 누워 있는 고등어를 들고 나왔습니다.
"자, 내가 네 소원을 들어줄게."
아이는 젖은 고등어를 자기 방에 가져와 깨끗한 종이 위에 눕혔습니다. 비릿한 고등어 냄새가 방 안 가득 고였습니다.
아이는 또 다른 종이 위에 크레용으로 바다를 그렸습니다. 커다란 종이에 그린 커다란 바다였습니다. 고기잡이 배가 없는 넓고 푸른 바다. 흰구름 사이로 갈매기만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바다였습니다. 그리고는 바다 깊숙한 곳에 고등어를 눕혔습니다.
"어때!"
"편안해. 아주 아주, 고마워. 나, 이제 여기서 잘거야. 오래, 오래."
고등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습니다. 편안한 목소리였습니다.
"얘, 혜리야. 여기 있던 고등어 어디 갔지?"
통화가 끝났는지 아주머니 목소리가 아이 방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이는 방문을 살짝 열고 작은 입술에 손가락 하나를 세웠습니다.
"쉿! 조용하세요. 지금 고등어가 잠들고 있어요. 가고 싶은 바다, 깊은 바다에 가기 위해서요."
"고등어가 잠을 자?"
귀가 번쩍 열린 아주머니가 아이 방으로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아!"
아주머니는 아이 등 뒤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았습니다. 어디선가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물씬, 바다냄새도 풍겼습니다.

감자밥


사흘, 이틀, 하루!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되었습니다. 초등학생이 되어서 네 번째 맞는 여름방학입니다. 올 여름방학은 무려 일 주일을 외할아버지 댁에서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지요.
반평생을 고등학교 체육교사로 보낸 외할아버지는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계십니다.
외할아버지는 참 무섭습니다. 환갑이 훨씬 지난 할아버지답지 않게 아직도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달리기도 하고, 커다란 두 눈을 부릅뜨고 호령할 때는 마당에 있는 강아지도 쩔쩔매지요. 저를 부를 때도 그래요.
"경미야!"
하고 부드럽게 불러주면 참 좋을 텐데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반경미!"
하고 출석을 부르듯 하지요. 그래도 나는 외할아버지가 참 좋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솜사탕막대처럼 꼿꼿한 면이 있는가 하면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면도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세 식구가 외할아버지 집에 도착한 때는 열두 시가 조금 지난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느라 아침밥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나는 배가 몹시 고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리 전화도 드렸기 때문에 한상 가득한 밥상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밥상 위에 가득한 것은 삶은 옥수수와 감자였습니다.
"밥은 서울에서 삼시 세끼 먹는 것이지만 옥수수와 감자야 별미 중에서 별미지, 그것도 내가 직접 가꾼 것이니까."
외할아버지는 목소리조차 싱글벙글했습니다. 외할머니도 덩달아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암만, 암만! 이게 어디 시장에서 사먹는 것과 같을라구!"
가마솥에서 금방 삶아낸 옥수수와 감자는 달큰하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모락모락 하얀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습니다.
"맞아요 선생님. 지금 딱 제철 음식이잖아요. 아유, 이 감자에 분이 핀 것 봐!"
아버지는 커다란 감자 하나를 젓가락으로 쿡 찍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휴, 이 냄새 좀 봐. 얼마나 오랜만이야!"
어머니는 노랗게 잘 삶긴 옥수수 한 자루를 들어 냄새부터 먼저 맡았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얼른 손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감자도 옥수수도 아버지 어머니처럼 그렇게 맛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점심으로 먹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경미는 왜 그러고 있니?"
어머니가 옥수수 자루를 입에 댄 채 물었습니다.
"안 먹을 테야?"
아버지도 입 안 가득 감자를 넣은 채 놀리듯이 말했습니다.
외할아버지도 외할머니도 걱정스러운 듯 한 마디씩 했습니다.
"흥! 난 그냥 저녁밥 먹을래요."
나는 밥상머리에서 발딱 일어섰습니다. 아마, 모두들 눈치챘을 겁니다. 내 마음이 좀 편치 않다는 것을요. 그리고 나는 한껏 예의바른 몸짓으로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그 때까지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 어리둥절했을 테니까요.
"충분히 이해 가네. 할멈, 따뜻한 밥 다시 하구려."
내가 마당으로 내려섰을 때 들리는 할아버지 목소리였습니다.
나는 마당을 가로질러 골목으로 나왔습니다. 돌담 밑으로 파랗게 과꽃이 자라고 있고 아침에 피었던 나팔꽃과 채송화가 시들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쁜 꽃도 풀죽은 모습은 보기 흉하구나!'
나는 얼른 기분좋은 얼굴을 만들었습니다. 입술을 뾰록 내밀어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그러나 소리는 잘 나지 않고
"반경미!"
하는 외할아버지 목소리만 들렸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어느 새 내 곁에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외할아버지는 꼭 솜사탕의 솜 같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다시 밥 지을 동안 우리 바깥 바람이나 쐴까?"
"외할아버지, 저 화난 게 아니어요. 저녁까지는 충분히 참을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잡힌 손을 마구 흔들며 말했습니다.
"알아, 알아. 네가 품위있는 손녀라는 것도 알지. 그렇지만 우리도 품위있는 정성을 보일 거야. 조금만 기다려, 그동안 우리 산책이나 하자."
외할아버지는 내 손을 끌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돌담과 토담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요리조리 걸었습니다. 집집마다 담장 위에 호박 덩굴을 올려놓고 키 큰 해바라기가 담장 꼭대기까지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한낮이라 그런지 호박잎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동구 밖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밑으로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여름만 되면 장기 바둑도 두고 낮잠도 자는 100명이 앉아도 될 만큼은 넓은 나무 그늘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점심시간이라 모두들 집으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마침 잘 됐네."
외할아버지는 누군가가 깔아놓은 돗자리에 풀썩 앉으며 삼베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습니다.
수백 개, 수천 개나 되는 느티나무 가지에서 귓속이 따갑도록 매미가 울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매미 우는 소리는 낮았다 높아졌다를 되풀이하고, 수십만 개의 느티나무 잎도 자랑자랑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느티나무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논에서 벼 자라는 냄새가 싸아하니 묻어왔습니다. 논에서 나는 냄새는 언제나 좋았습니다.
"자, 오늘은 이 할애비가 오래 묵은 이야기를 한 자루 해야겠다."
"이야기를요?"
"그래, 이야기 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구나. 사람도 없고, 논에서도 저리 구수한 냄새가 나니 말이다. 옛날에는 저 냄새로 배를 채운 적이 있지."
수상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또 캐캐묵은 옛날 이야기, 배고프던 시절 이야기 하나를 할 요량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읍내 고등학교에서 체육 선생님을 할 때니까 지금부터 한 30년 전이네. 네 어머니 나이가 열 일곱이었으니까."
나는 귀가 솔깃했습니다. 아무래도 나무껍질 벗기고 풀뿌리 캐던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네 어머니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막 끝냈을 무렵이었지."
외할아버지는 삼베바지를 훌렁 걷어올린 맨다리를 슬슬 문지르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내가 훈육주임이었는데 호랑이 선생으로 통했지, 나는 아침마다 교문을 지키며 복장이 단정한지, 머리는 길지 않는지, 모자는 똑바로 쓰고 있는지를 살폈단다. 그 때는 고등학생이 모자도 쓰고 머리도 박박 깎았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어느 날 아침 어느 모로 보나 티 하나 잡을 데 없는 녀석이 지나가는데 술냄새가 폴폴 나는 거야. 자세히 보니 얼굴도 볼그리하고. 그래서 다짜고짜로 불러 세웠지.
"너 이리 와봐!"
녀석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어.
"너 술 마셨지?"
녀석은 고개를 푹 숙였어. 아무 말없이. 나는 이것저것 더 물어보고 혼을 내주고 싶었지만 참았어. 녀석은 깡마르고 했지만 너무나 단정하고 순해 보였으니까. 그리고 오늘이 집안 어른 중에 어느 분 생일이어서 아침밥을 먹으면서 복술 한 잔을 얻어마셨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학교에 올 때는 술 마시면 안된다."
하고 그냥 돌려보냈지.
그런데 말이야, 그 다음 날 아침에도 이 녀석이 지나가는데 얼굴이 볼그리한 거야. 나를 피해서 멀찌감치 가는데 아무리 봐도 이상했어. 그래서 또 불러 세웠어. 녀석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고 어딘가에서 계피냄새가 났어. 가만히 보니까 녀석은 입 안에 계피 조각을 넣고 꼭꼭 씹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술냄새는 안났지. 나는 화가 났어.
'이 녀석이 분명 나를 속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너, 오늘 아침에도 술 마셨지?"
하고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로 물었지. 그러니까 녀석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드는데 붉은 눈자위 사이사이로 눈물이 고여있는 거야. 그리고는 무슨 말인가 할려는 입술로 나를 바라보는데 그 때를 노려 몇 녀석이 후다닥 내 곁을 달려가는 거야. 보나마나 복장이 불량한 녀석들이 그런 틈을 노렸다가 그냥 들어갈려는 수를 쓴 거지. 내가 거기에 넘어갈 사람이냐? 녀석에게는 얼른
"내일부터는 정말 조심해!"
하고 돌려보내놓고는 쏜살같이 달려가 저만치 달려가는 세 녀석을 잡아 혼을 내줬지.
그런데 말이야. 그 다음 날은 토요일인데 내 앞을 걸어가는 녀석의 얼굴이 유난히 핼쑥한거야. 걸음걸이도 몹시 힘없어 보였어.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저 녀석이 어쩌면 알콜 중독자인지도 몰라.'
라고. 그리고 그 다음 월요일 아침이었어. 누구보다 학교에 일찍 가야할 사람이 난데, 그 날따라 네 외할머니가 아침밥을 늦게 해줬지. 그래서 화가 나 출근을 했는데 그 녀석이 또 불그레한 얼굴로 나를 비켜가는 거야. 그 날은 술냄새도 아주 진하게 났어. 나는 화가 무척 났지, 그래서
"야, 임마!"
하고 불러 세우자마자 뺨을 후려갈겼지. 그것도 이 쪽 저 쪽 몇 대씩이나.
"너는 도대체 선생님 말이 무슨 소리로 들리는 거야. 동네 개 짖는 소리로 들려. 벌써 몇 번째야. 엉!"
나는 집에서부터 일기 시작한 화를 녀석에게 다 풀어버린거야. 녀석은 저만큼 던져져 있는 가방을 주워들고 내 앞에 와서 서는데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지 맞아서 비틀거리는지는 모르지만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어. 그제서야 나도 너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내일부터는 조심해, 들어가!"
였지.
그런데 말이다. 그 날 점심 시간에 점심을 먹고 오니까 내 출석부에 잘 접힌 종이 쪽지가 하나 들어 있었지.
<선생님, 오늘 아침에 선생님이 두들겨 팬 친구는 아침밥 대신 술찌꺼기를 씻어서 먹고 오는 친구입니다. 친구의 아버지가 술도가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얻어오는 술찌꺼기를요. 용서해 주세요. 저희들이 대신 용서를 빕니다. 2학년2반 남학생 일동>
아!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았지. 그 날 아침 내게 맞아서 쓰러지던 그 녀석처럼. 마음이 너무 아팠어. 손목을 댕강 잘라버리고도 싶었어. 그 녀석을 찾아가 꼭 껴안으며 펑펑 울고도 싶었어. 2학년2반 교실을 찾아가 아이들에게 넙죽 엎드려 오히려 내가 용서를 빌고 싶었어. 그러나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나는 그 녀석을 조용히 불렀어. 마침 교무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열린 창문으로 화단에서 풍겨오는 꽃잎들 냄새만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지. 오늘처럼 말매미가 긴 소리로 울었고, 나는 아무 말없이 녀석의 손만 힘주어 잡았지. 그런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나는 주책없이 녀석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
그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그 녀석이 학교 앞 해장국 집에서 매일 아침밥을 먹도록 했지. 그리고 도시락을 세 개 싸와 하나는 내가 먹고 나머지 둘은 그 녀석이 점심과 저녁으로 먹도록 했단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술을 딱 끊었어. 아직 한 방울도 안마셨지. 그래서 술값으로 모은 돈을 녀석의 대학등록금으로 줬어.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마음 속 깊은 곳이 멍이든 것처럼 아프단다.
외할아버지는 정말 마음이 아픈지 맨다리를 어루만지던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왠지 모르게 내 가슴도 아팠습니다. 잠시 외할아버지가 미워지고 그 오빠가 불쌍했습니다.
"그 다음은요?"
나는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그 녀석이 어떻게 됐느냐고?"
"네."
"그 녀석, 나도 저를 잊지 못하지만 그 녀석도 나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지. 그래서 가끔 찾아오지. 지금도 내 집에 찾아와 있지."
"지금도요?"
나는 가슴이 확 열려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래, 반상수. 그 녀석이 그 녀석이지."
반·상·수, 반상수는 바로 내 아버지 성함입니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그래서 아버지는 외할아버지를 보고 선생님이라 부를 때가 많았고 깎듯이 대하는구나.
"외할아버지!"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알 수 없는 눈물이었습니다. 내가 외할아버지에게 살풋 몸을 기대자 외할아버지는 나를 달랑 들어 업었다.
"밥이 다 됐겠구나. 따뜻하고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쌀밥 먹으러 가자."
그러나 나는 외할아버지 등에 업힌 채 골목길을 돌고 돌아서면서 내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술찌꺼기를 밥삼아 먹었던 아버지, 그래서 외할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쓰러지던 아버지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아이구, 우리 경미 아기가 되어 돌아 왔네!"
외할머니가 반기면서 정말 김이 솔솔 피어 오르는 쌀밥을 고기 반찬과 함께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밥상 한 쪽에 놓여있는 식은 감자를 숟가락으로 으깨고 또 으깨어 감자밥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술찌꺼기를 밥삼아 먹던 아버지가 생각나 감자밥조차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아빠."
하고 부르고 싶은데 자꾸자꾸 눈물만 났습니다.

* 지면 관계상 수상작품 전체를 싣지 못하고 수상작품집『잠자는 고등어』중 <잠자는 고등어>와 <감자밥> 두 작품만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