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졸업하고 몇몇 친구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사회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몇 개월에 한 번씩 만나는 것도 힘들었지만 모임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거웠다. 물론 만나서 하는 거라고는 사는 얘기하면서 술 마시는 게 전부이긴 해도 친구들 얼굴 보는 것, 추억을 공유하는 것으로도 좋은 시간들이었다.
한 친구는 언제나 술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다니는 직장을 접고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면 친구들에게 거하게 한잔 사겠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술주정이니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그 친구는 정말 다니는 은행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정말 대단한 용기였고 몇 년을 고생하더니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는 약속대로 우리에게 멋진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우리는 진정으로 성공을 축하해 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는 우리의 친구임을 자랑스러워했고 우리도 그의 고생담과 성공담을 자랑스러워했다.
몇 번의 모임을 가지고 몇 번의 계절이 바뀌어 나의 생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직장도 옮겨 새로이 적응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대금결제일이 다가왔는데 수표로 물품대금을 받아 인출이 안 되니 하루만 쓸 테니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모임에서 힘들 때가 오면, 조금이나마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처했다.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금전적인 도움을 필요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나는 친구하고는 금전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항상 다짐했었다. 우정이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저런 핑계를 들어 돈을 빌려 주진 않았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잘 해결되리라고 믿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에 다른 친구가 부친상을 당하여 문상을 갔다. 사업을 하는 친구는 오지 않았다. 다른 친구를 통해 그 친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 중국으로 피신중이라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많은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금전적인 도움을 준 친구들도 몇 명 있었다.
물론 그 돈을 받지 못 하고 있지만, 내가 그 친구에게 도움을 주겠다던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쉽게 뱉어버린 말에 친구가 너무 믿어서일까? 다시 친구가 사업에 재기해서 만나길 바라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는 내가 한 말을 그저 흘려듣지 않고 친구가 해 줄 수 있는 약속으로 해석하고 있었다면 나는 참 신의 없는 인간이 되고 만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긴 해도 나는 꼭 그가 다시 성공해서 우리 앞에 나타나길 고대한다. 별 도움이 안 된 내게 욕을 하더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