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료를 드립니다

“이 번호는 고객님의 요청에 의해 착신금지 된…….”
장우는 음성 안내가 다 끝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캐나다에서 돌아와 안부라도 묻고 싶어 전화를 했지만 장군이의 새 가족인 김성달 씨와는 한 달째 통화가 되지 않았다. 애견 카페에 남아 있는 댓글을 찾아 메일도 보내고 쪽지도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장우는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어 잠도 오지 않았다. 철망에 갇힌 장군이의 슬픈 표정이 눈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나 됐는데 자기를 찾아가지 않은 걸 알면 장군이는 얼마나 섭섭해할까. 언제든지 볼 수 있게 해 준다던 어른들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네 달 전 장우는 누나 은비, 그리고 엄마와 함께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었다. 그 전에, 혼자 남을 아빠를 위해 마당 있는 집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장군이와도 헤어져야 했다. 장우가 처음부터 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자신은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유학을 떠나지만 장군이만은 낯선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뉴스에서 봤는데 아파트에서 큰 개 키워도 된다고 판결났대. 그러니까 장군이, 우리랑 계속 살아도 되잖아.”
아빠도 장군이와 함께 지내면 덜 외로울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회사의 새 프로젝트 때문에 외롭기는커녕 집에도 못 들어올 때가 많을 거라고 했다.
“안 바쁘다고 해도 털 빠지는 거 하고, 똥 싸는 걸 아빠가 어떻게 감당을 해?”
엄마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장군이가 아파트에 갇혀 똥과 털이 범벅이 된 채 혼자 밥 먹고 혼자 놀 모습을 상상하자 장우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아빠나 엄마도 장군이를 아무 데나 팔아 버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개를 아끼고 사랑하는 집으로 보내 안부라도 알고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장우네 가족은 애견 카페에서 장군이의 새 가족을 찾기로 했다. 장우는 시베리아 벌판에서 썰매를 끌던 혈통인 장군이를 키우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거라고 확신했다.
은비가 장군이의 사진과 함께 무료 분양 광고를 올렸다.

- 키우고 싶은데 털 장난 아니게 빠진다네요. 우리 집은 좁아서...
- 시베리아 허스키 사료 값 많이 들어요.
- 평균 수명이 11~13살이라는데 11살이면 곧...ㅜㅜ 아무리 시베리아 허스키라고 해도...ㅜㅜ
- 운동 시켜 줘야 하고 목욕 시켜 줘야 하고 손이 많이 갑니다.
- 똥도 엄청 싸요.ㅋㅋ
- 무료 분양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마지막까지 잘 키울 수 있는 분이 데려가야 개도 행복하니까요.
- 좋은 새 주인 만나기를 빌게요!

장우는 다른 사람들 눈에 장군이가 키우기 어려운 데다 수명마저 다한 골칫덩어리로 보인다는 것이 당황스럽고 속상했다. 장군이는 어미젖을 떼자마자부터 10년 넘게 장우네와 살았다. 열두 살인 장우는 살아온 삶의 대부분을 장군이와 함께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사람과 개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서, 장우는 아직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소년이었고 장군이는 기력이 달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할아버지 개가 됐다.
“틀린 말은 아니지 뭐. 우리야 정이 들었으니까 그렇지 다시 키우라고 하면 못 키울 거 같아. 애 하나 키우는 것보다 더 힘들다니까.”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장군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편을 들었다.
“장군이 나이가 문젠 거 같아. 솔직히 언제 떠날지 모르는 개를 선뜻 데려가고 싶겠어. 죽,(아빠는 장우 눈치를 슬쩍 보았다.) 아니 그때까지 사료를 대 주겠다고 하면 어떨까? 그 대신 우리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게 해 주는 집을 찾아보는 거야.”
아빠가 의견을 냈다. 장우네 상황에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아빠가 사료 갖다주면서 장군이 보고 오면 되겠다.”
장우는 아빠가 말한 ‘죽, 아니 그때까지’의 뜻을 짐짓 모르는 척했다.
“아빠가 직접 갖다줄 시간이 어딨어? 돈으로 보내 주는 게 젤 편해. 한 달 사료 값만큼 자동이체 해 놓으면 되잖아.”
엄마가 반대를 했다. 아빠는 바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어길 때가 종종 있었다.
“그 돈은 다른 데 쓰고 장군이한테 사료 안 사 주면 어떡해?”
누나와 나눠 가지라고 큰아빠가 준 용돈을 혼자 다 써 버린 적이 있는 장우는 은비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달에 한 번씩 사료로 보내 주는 게 가장 낫겠네. 인터넷 쇼핑몰에서 배달시키지, 뭐.”
“진짜진짜 잊어 먹으면 안 돼, 아빠.”
아빠의 말에 장우가 다짐을 두었다.
“알람 해 놓고 꼭 보내 줄게.”
아빠가 약속했다.
“돈으로 보내는 것보다 불편하긴 하지만 새 주인도 사료 받을 때마다 우리 정성 생각해서라도 장군이한테 잘해 줄 거야.”
엄마 말에 장우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리고 장군이를 정말로 사랑해 줄 새 주인이 나타나길 빌었다.
사료를 대 주겠다고 해서인지 몇 집이 키우겠다고 나섰다. 직접 연락을 취한 끝에 장우네 가족은 안성에 사는 김성달 씨네 집으로 결정했다. 장우네 집인 용인에서 가까운데다 개를 키워 본 경험도 많고 무엇보다 장우와 동갑인 열두 살짜리 남자 애와 여동생이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 애들이 장우처럼 장군이를 예뻐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쁜 엄마 아빠 대신 김성달 씨가 와서 장군이를 데려가기로 했다.
보내기 전날 장우는 아빠와 함께 장군이의 목욕을 시켰다. 다시는 못 볼 것처럼 허전하고 슬펐다. 장우는 아빠한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굴에 튄 물을 닦는 척하며 눈물을 훔쳤다.
“아빠가 시간 내서 찾아가 볼게. 그때 영상 통화로 장군이 모습 보여 줄 테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그리고 넌 방학 때 와서 가 보면 되잖아.”
장우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아빠를 믿었다.
그날 밤 장우는 장군이의 새 주인에게 줄 주의사항 목록을 작성했다. A4 용지 가득한 항목들 중엔 장우가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들도 많았다. 특히 ‘하루에 한 번씩 운동시키기’라고 쓸 때는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친구들과 노느라 그 일을 건너뛰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장군이는 썰매견 혈통이라서 그런지 운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도 요즘엔 장군이가 귀찮아한다는 핑계로 산책도 제대로 시켜 주지 않았다. 주의사항을 적는 동안 이상하게 잘해 준 것보다는 못한 것만 생각났다. 장우는 맨 끝에 장군이의 전 주인이 자신임을 김성달 씨네 가족이 잊지 않도록 이름을 써 넣었다.
새 주인 김성달 씨는 철망으로 된 상자가 실린 트럭을 끌고 왔다.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아빠가 권유했지만 김성달 씨는 장군이를 데려다 놓은 다음 일을 하러 가야 한다며 사양했다. 아빠는 엄마에게 음료수를 밖으로 내오라고 일렀다.
주스를 마신 뒤 아빠와 김성달 씨가 힘을 합쳐 장군이의 집을 트럭 짐칸에 싣는 동안 장우는 엄마와 함께 개줄, 밥그릇 같은 살림살이를 챙겼다.
점점 더 굼떠지고 웬만한 일에는 관심도 갖지 않던 장군이가 자신의 물건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불안한 듯 서성거렸다. 장우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장군이를 쓰다듬어 진정시켰다. 마음속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장군이를 태울 차례였다. 김성달 씨가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장우더러 장군이를 트럭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장우가 줄을 잡자 장군이는 산책 가자는 줄 알고 앞장섰다.
트럭은 대문 앞에 있었다.
“네가 짐칸에 올라가서 불러라.”
장우가 트럭에 올라타서 부르자 앞발을 치켜드는 장군이를 아빠와 아저씨, 엄마까지 가세해 차에 태웠다. 장군이를 유인하라는 아저씨의 말에 장우는 모조 뼈다귀를 철망 상자 안으로 던져 넣었다. 장군이가 뼈다귀 물어오는 놀이를 하는 줄 알고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가자 짐칸에 뛰어오른 아저씨가 재빨리 가로빗장을 질러 문을 닫았다. 처음으로 어딘가에 갇혀 본 장군이는 철망 상자가 들썩거릴 정도로 펄쩍펄쩍 뛰었다. 장우는 차마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송별회 한다며 아침에 외출한 은비가 차라리 부러웠다.
“장군아, 미안해, 미안해.”
장우는 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철망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먼저 트럭에서 내린 김성달 씨가 장우도 내리라고 했다. 엄마의 채근에 마지못해 트럭 난간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은 장우를 김성달 씨가 번쩍 안아서 내려 주었다.
“개를 아주 잘 다루시네요.”
아직도 장군이 목욕을 시킬 때마다 진땀을 빼는 아빠가 말했다.
“예, 제가 예전에 개장수를 했었거든요.”
김성달 씨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장우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장군이를 가족처럼 아껴 줄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개장수라니. 개장수라면 장군이를 보신탕집에 팔아 버릴지도 모른다. 철망 우리 안에 갇힌 장군이는 영락없이 어디론가 팔려가는 모습이었다. 곧 울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진 장우를 본 아저씨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젠 아니니까. 우리 애들 친구 삼으려고 데려가는 거야. 잘 키울 테니 나중에 보러 와.”
장우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밤에 적어 놓았던, 장군이를 위한 주의사항 목록을 아저씨에게 주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장군이 진짜진짜, 예뻐하면서 키워 주셔야 해요.”
장군이를 실은 차가 골목을 빠져나간 뒤 세 식구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항아리 같은 바깥 살림살이들에 이어 마지막으로 장군이조차 사라진 마당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처럼 휑하게 느껴졌다. 장군이가 없어진 것을 가장 좋아할 줄 알았던 엄마가 허전한 표정으로 마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장군이를 보내고 나니까 이사 간다는 게 실감 나네. 이 집도, 장군이도 정 많이 들었는데……. 장군이 데려간 사람, 잘 키워 주겠지?”
엄마가 자신에게 묻듯 말했다.
“그렇게 믿어야지.”
장우의 어깨를 끌어안는 아빠의 목소리에도 허전함이 배어 있었다.

2. 빈집
많은 것을 버리고 간 장우의 캐나다 생활은 세 달 만에 끝났다.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계시던 외할머니가 암 말기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3개월도 못 사신다고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막내인 엄마는 다섯 살이었다. 외할머니는 네 명의 딸을 먹이고 가르치기 위해 어린 엄마를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과일 장사를 했다.
인자하고 푸근했던 할머니는 치매를 앓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거칠고 사나워졌다. 장우는 사람을 보면 마구 소리 지르고 아무거나 던지고 욕하는 외할머니가 점점 더 무섭고 싫어졌다. 엄마와 이모들은 그 증상이, 평생 고생만 하고 참으며 산 것에 한이 맺혔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결국은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냈다.
“셋째 언니가 엄마 도망갈지 모른다고 잘 지키라고 해서 화장실도 못 갔었다니까.”
“엄마가 우리 버리고 딴 데로 시집가 버릴 거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단 말야. 내가 왜 공부를 못했는 줄 알아? 학교에 가서도 그 걱정하느라고 그런 거야.”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떠난 뒤에도 이모들과 웃으며 옛날 이야기를 하던 엄마는 펑펑 울며 큰이모와 통화를 했다.
“언니, 나는 엄마는 평생 안 돌아가실 줄 알았어. 치매에 걸려서 우리를 못 알아봐도, 그렇게라도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어.”
그 뒤로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엄마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외할머니의 남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고 했다.
“엄마 다시 올 거니까 홈스테이 이모 말 잘 듣고 잘 지내고 있어. 은비는 장우 잘 돌봐 주고 장우는 누나 말 잘 듣고. 알았지?”
한국보다 좋다는 은비와 달리 모든 것이 여전히 낯선 장우는 엄마 없는 캐나다에 남고 싶지 않았다.
“나도 엄마랑 같이 갔다 올래.”
“무슨 소리야? 9월에 학교 들어가려면 영어 공부 열심히 해야 돼.”
“영어는 한국에 가서 해도 되잖아. 나도 할머니 보고 싶단 말이야.”
장우는 외할머니를 내세워 고집을 부렸다.
“엄마, 장우 두고 가면 나 스트레스 받으니까 데리고 가.”
은비 말에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장우의 비행기 표도 예약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장우는 새 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미 개학을 해 한 달도 더 지난 상태였다. 장우는 다시 헤어져야 할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캐나다에 가기 전 며칠 살았을 뿐인 아파트의 빈집에 들어서면 남의 집인 듯 서먹했고 장군이 생각만 났다.
장우는 한국에 돌아온 날부터 장군이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엄마는 외할머니 때문에 장군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새 제품을 출시한 아빠보다는 엄마가 덜 바빴다. 하지만 엄마는 장우가 조를 때마다 다음으로 미루거나 숙제와 시험을 끄집어내 야단을 쳤다.
김성달 씨가 음흉한 미소를 띄며 장군이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 꿈을 꾼 날 장우는 엄마에게 사정했다.
“엄마, 아무래도 이상해. 장군이한테 무슨 일 생긴 거 같아. 엄마, 제발 나 좀 장군이한테 데려다 줘, 응?”
엄마는 다른 때와 달리 한동안 장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외할머니가 지금 사경을 헤매시는데 어쩌면 너는 손자가 돼 갖고 개 타령만 하고 있니?”
장군이가 잘못됐을지도 모르는데 ‘개 타령’이라니. 엄마가 화를 냈다면 장우도 같이 화를 내며 대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엄마는 마음뿐만 아니라 온몸까지 슬픔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장우는 죄책감을 느꼈다. 치매에 걸리기 전의 할머니는 안쓰러운 막내딸에 대한 마음까지도 보태 장우를 사랑해 주었다. 그런 할머니가 지금 오락가락하는 정신과 암 덩어리에게 정복당한 몸으로 병실에 누워 있다. 길게 고생하는 것보다 차라리 돌아가시는 게 낫겠다고 이모들은 말했지만 장우는 할머니와 이별을 앞둔 엄마의 심정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장우는 잠시 떨어지는 것도 못하겠어서 한국으로 따라왔는데 엄마는 이제 자신의 엄마와 영원히 헤어지게 된 것이다. 장우는 그런 엄마에게 더 이상 보챌 수가 없었다.
대신 모든 원망과 서운함이 아빠에게로 쏟아졌다. 캐나다에서 아빠와 통화할 때마다 장우는 장군이 안부를 물었고 그때마다 아빠는 주말에 꼭 가 보겠노라고 대답했었다.
“거짓말쟁이. 한 번도 안 가 보는 게 어딨어? 장군이가 얼마나 서운하겠어? 얼른 데려다 줘.”
“아빠 좀 봐주라. 외할머니한테도 못 가 볼 정도로 바쁜 거 너도 알잖아. 이번 주말에는 만사 제쳐 놓고 병원에 가봐야 돼. 네 엄마가 지금 얼마나 화났는 줄 알아?”
“그럼 외할머니한테 갔다가 장군이한테 가.”
“장우야, 근데 아빠가 생각해 보니까, 한번 줬으면 그만이지 우리가 찾아가면 장군이 새 주인이 불편해할 것 같아. 장군이도 새 집에 적응해야 하는데 자꾸 우리가 가면 더 안 좋을 거야.”
“자꾸가 아니라 한 번도 안 갔잖아. 어떻게 장군이한테 그럴 수가 있어?”
“그래도 사료 꼬박꼬박 보내 주잖아. 차라리 돈으로 보내는 게 편하지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 줄 알아?”
아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표정이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인 줄 진즉에 알았어야 했다. 세 달은 캐나다에서는 아무리 길게 느껴졌다고 해도 10년이나 같이 산 장군이에 대한 마음이 변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이제 장군이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은 장우 혼자뿐인 것 같았다.
결국 장우는 혼자 장군이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 용기가 생긴 것은 캐나다에 다녀온 덕분이었다. 엄마와 동행이긴 하지만 남의 나라에서도 살다 왔는데 같은 경기도에 있는 곳을 못 찾아갈까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장우는 캐나다에서 길눈이 어두운 엄마와 누나 대신 지도를 보고 길을 찾은 적도 있었다.
장우는 아빠 책상에서 김성달 씨네 주소를 찾아냈다. 안성시 양성면으로 시작하는 주소는 캐나다만큼이나 낯설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다행히 용인 터미널 앞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가는 방법이 생각보다 쉽자 이번에는 혹시 이사를 갔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빠가 보내 주는 사료가 아무 문제없이 배달되고 있으니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나쁜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드디어 놀토. 장우는 장군이에게 가기 위해 전날 미리 싸 놓은 가방을 둘러멨다. 가방 안에는 캐나다 마트에서 산 개 껌과 두뇌개발 공, 관절 영양제 등이 들어 있었다. 엄마가 한국에도 다 판다고 말렸지만 장군이를 생각하며 용돈을 털어서 산 것들이다. 장우가 한순간도 자신을 잊은 적이 없음을 알면 장군이의 서운함도 좀 풀릴 것이다.
장우는 모험에 나선 기사라도 되는 양 비장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아빠와 엄마는 각기 회사와 병원으로 출근했기 때문에 장우의 출발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중간고사를 위한 문제집을 풀어 놓으라고 했지만 아마 검사를 할 정신도 없을 것이다. 엄마의 슬픔을 이용하는 것 같아 찔렸지만 그보다 장군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용인 터미널 앞에서 버스를 탄 장우의 마음속에선, 곧 장군이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과 처음 가는 길에 대한 긴장감이 시소를 타고 있었다. 용인 시내를 벗어나자 창밖 풍경은 아파트 단지, 공장, 학교, 우체국, 마트 같은 건물들과 논밭이 뒤섞여 펼쳐져 도시와 농촌의 구분이 없어 보였다.
장우는 밖을 내다보며 자신이 내릴 정류장 이름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드디어 다음 정류장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은 한 아줌마와 장우뿐이었다. 장우는 용기를 내 아줌마에게 주소를 보여 주며 위치를 물었다. 아줌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소가 적힌 종이와 마을을 번갈아 바라보다 동네에서 좀 떨어진 외딴집을 가리켰다.
“저 집인 것 같은데. 근데 저 집은 빈집이었는데 누가 이사 왔나?”
동네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아줌마의 혼잣소리에 장우는 심장이 툭,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망연해진 마음으로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장우는 심호흡을 한 뒤 외딴집 쪽으로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 집까지 가는 동안 장우의 마음과 발은 계속 엇박자를 냈다. 장군이를 얼른 보고 싶은 마음과 없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끊임없이 실랑이를 벌였기 때문이다.
논과 밭을 지나 다다른 외딴집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한옥이었는데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허름해 보였다. 겉모습만으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 같았다. 낡은 대문 옆에 달려 있는 초인종을 눌렀지만 고장 났는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대문을 두드려 보아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조심스레 대문을 밀어 보니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장우는 쿵쿵 뛰는 가슴을 간신히 누르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가장 먼저 낯익은 장군이의 집과 밥그릇이 보였다. 제대로 찾았다는 기쁨에 터져 나오려는 환호성을 비어 있는 개집이 막았다. 장우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장군이의 빈집 앞에 서서 장우는 찬찬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미음자 형태의 건물로 둘러싸인 마당은 시멘트로 발라져 있었고, 방이거나 부엌이거나 창고, 화장실 같아 보이는 건축물들은 하나같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깨진 유리를 청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인 미닫이문 아래에 신발 두어 켤레가 나뒹굴고 있는 것과 빨랫줄에 널린 옷이 아니었으면, 아무리 장군이의 물건이 있다고 해도 빈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장군아! 장군아!”
혹시나 하고 불러 보았지만 장군이는 물론 사람 기척도 나지 않았다. 토요일이니 장군이를 데리고 어디로 놀러간 걸까? 장군이의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장우의 눈길이 밥그릇에서 멈추었다. 밥그릇에 붙어 있는 밥풀 때문이었다. 장우네 집에서는 장군이에게 사람이 먹다 남긴 음식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람 음식을 먹으면 건강에 안 좋고 이빨에 이상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개집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사료가 담긴 봉지는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리 깨끗이 해도 더러 있게 마련인 털이나 똥 같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장우는 뒤이어 든 생각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개장수였던 김성달 씨가 장군이를 다른 곳에 팔아넘겼을 수도 있다. 밥풀의 주인은 장군이가 아니라 다른 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부터 그러려고 마음먹고 장군이를 데려간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시치미를 떼고 사료를 받아 챙기는 것이다.
장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두 번째에야 전화를 받은 아빠는 장우가 말을 할 새도 없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우야, 외할머니 지금 막 운명하셨다. 아빠가 저녁때 데리러 갈 테니 준비하고 있어.”
장우는 집이 아니란 소리도 하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터져 나온 울음이 할머니 때문인지 장군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3. 일기장 속 장군이
오래간만에 친척들을 만날 수 있었던 할머니의 장례식은 잔치 같은 느낌이었다. 장우가 그동안 가 보았던 결혼식이나 생일 같은 잔치와 다른 점은 간간히 구슬픈 울음이 끼어든다는 것과 주인공이 없다는 것이다. 엄마와 이모들은 울다가 농담도 하고 웃기도 했다. 특히 큰이모는 어떻게 그렇게 울음과 웃음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장우 역시 사촌형, 누나들과 장난치며 놀다가 엄마가 울면 따라서 눈물이 나왔는데 할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처럼 나이 든 장군이 생각이 더 많이 났다. 그날 끝내 장군이를 보지 못하고 왔기 때문에 더 그랬다.
삼우제까지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바닥에 주저앉아 장례 기간 동안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아 내며 울었다. 울음을 그치고 난 엄마는 온몸이 눈물이었던 것처럼 빈껍데기만 남은 모습으로 앓아 누웠다. 바로 캐나다행 짐을 쌀 줄 알았던 장우는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겨우 참았다는 듯이 은비가 엄마더러 빨리 오라고 성화를 부려 댔다. 장우는 조바심이 났다. 자칫하면 장군이도 못 보고 캐나다로 떠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우는 아빠에게 그동안 겨를이 없어 못했던 김성달 씨 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이번 달 사료는 그 집에 가서 확인해 본 다음에 보내 줘.”
아빠는 장우 혼자 장군이에게 다녀왔다는 말에 많이 놀랐다.
“아빠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미안해. 그런데 아직 확실한 건 모르니까 사료는 일단 제 날짜에 보내 주는 게 좋겠다. 그리고 주말에 꼭 가 보자.”
아빠가 이번에는 약속을 지켰다.
“여길 혼자 찾아왔었단 말이야?”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운전을 하며 아빠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터미널 앞에서 버스 한 번만 타면 돼. 아빠, 장군이한테 무슨 일 생겼으면 어떻게 해?”
아빠와 함께인데도 지난번보다 더 두렵고 불안했다. 외딴집 앞에 차가 도착했을 때는 그냥 되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집은 여전히 비어 있었지만 그 사이 더 낡고 지저분해진 것 같았다. 오늘도 뜰 위의 신과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만이 빈집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빨아 넌 지 얼마 안 되는 듯 옷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장우가 장군이 집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봐. 집은 이렇게 더러운데 장군이 똥도 없고 털도 없어. 사료 봉지도 없고.”
주의 깊게 집 안을 둘러보던 아빠가 뜰 위로 올라가 미닫이문을 열었다. 방과 방 사이의 마루 위엔 책, 공책 같은 학용품과 옷, 그릇 등 각기 다른 공간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이 뒤섞여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장군이가 한바탕 휘저어 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아빠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빠, 장군이 어디다 팔아 버렸으면 어떻게 해?”
장우의 말에 아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때 웬 할머니가 대문을 열며 들어섰다. 아빠와 장우는 동시에 김성달 씨 어머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누구요? 혹시 이 집 친척이시우?”
그러나 할머니는 되려 장우네에게 물었다.
“아닌데요. 저흰 이 집에 사는 김성달 씨 만나러 온 사람입니다. 혹시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빠가 물었다.
“피해자 식군가 보네.”
할머니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개집 쪽으로 가더니 들고 있던 비닐봉지의 내용물을 그릇에 쏟아 부었다. 날생선 대가리에서 비린내가 확 풍겼다. 장우는 그것이 자기 위에 쏟아지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랐다.
“할머니, 그거 개 주시는 거예요?”
장우가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
“그려. 이 집 개 줄라고 부러 갖고 왔어. 사고 당한 건 억울하겠지만 이 집 형편 봐서 웬만하면 합의 좀 해 주시우.”
할머니는 사람을 착각한 듯 자꾸만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그 개, 어떻게 생겼어요?”
장우가 다그치듯 물었다.
“똥개 같이는 안 생겼던데. 털이 시커멓고 허연게 꼭 늑대마냥 생겼어.”
장군이었다! 나쁜 상상을 했었지만 다행히 장군이는 이 집에 있었다. 장우가 할머니에게 화난 기색으로 말했다.
“할머니, 우리 장군이한테 그런 거 먹이면 안 돼요. 우리 장군이한테는 사료만 먹여야 한다구요.”
할머니는 잠시 장우와 아빠를 번갈아 보다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 이 집 개 전 주인들이구먼. 개 보러 온댔다고 애들이 그러더니만 정말 왔네. 도시서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시골에서는 다 이렇게 사람들이 먹다 남은 거 먹여서 키운다. 사람이 굶어 죽을 판에 무슨…….”
“우리가 꼬박꼬박 사료 보내 준단 말이에요.”
장우가 소리쳤다. 할머니가 옷자락 터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 사료, 내가 돈하고 바꿔다 쓰게 해 줬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김성달 씨 지금 어딨는지 아세요?”
그제서야 아빠가 나섰다. 할머니가 아빠와 장우를 바라보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차 사고를 냈는데 합의금이 없어서 감옥에 갔다우. 벌써 세 달째야. 애들만 있으니 꼴이 말이 아니야.”
할머니가 말끝에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애들만 있다니요? 김성달 씨 부인은요?”
아빠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부인이 어딨어? 홀애빈걸.”
“그럼 애들끼리만 지낸다는 겁니까? 다른 친척이라도 있을 거 아닙니까?”
아빠가 놀란 얼굴을 했다. 장우도 이런 집에 어떻게 아이들끼리만 있을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몇 달 전에 외지서 이사 와서 속사정은 잘 몰라. 애들 말로는 고모가 있는데 연락 끊긴 지 오래래. 에구, 난 가 봐야 하니 기다렸다 보고 가시우.”
할머니가 허리를 두드리며 대문 밖으로 사라지고 난 뒤 장우는 마루 끝에 앉았다. 아내와 자식을 유학 보내고 혼자 지내는 기러기 아빠는 많이 봤어도 자식들만 남겨둔 채 감옥에 간 아빠는 본 적이 없었다. 캐나다에도 아이들끼리만 와 있는 경우가 많이 있었지만 그 애들에게는 밥을 해 주고 보호해 주는 어른들이 있었다. 둘째 이모가 아팠을 때도 큰이모와 엄마가 돌아가며 사촌누나들을 돌봐 주었다. 고모부네 회사가 부도났을 때는 아빠가 나서서 고모부 취직을 도와주었다.
장우는 아이들과 개만 남겨둔 채 어른들이 자취를 감춘 이야기는 동화책에서도 만화책에서도 본 적이 없고 누군가에게 들어본 적도 없었다. 개 사료를 팔아 생활을 하다니. 엄마가 후원하는 아프리카 아이도 아닌데 말이다.
장우는 장군이를 도로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주인에게 보호받기는커녕 자기 먹이까지 뺏겨야 하는 이런 곳에 늙은 장군이를 더 이상 둘 수 없었다.
장우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불안한 기색으로 마당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빠도 내 마음 같을 거야.’
장우가 입을 열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말했다.
“장우야, 그만 가자.”
“뭐? 장군이 데리고 가야지.”
장우가 깜짝 놀라 아빠를 쳐다보았다.
“회사에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는데 깜빡했어. 얼른 가야 돼.”
장우는 장군이의 상황을 모르는 척하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 장군이 데려가자. 아빠가 못 키우겠으면 내가 다른 데 다시 알아볼게, 응?”
장우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건 쉬운 줄 알아? 그리고 애들만 있는데 어떻게 장군이를 도로 데려가?”
아빠가 대문 쪽을 힐끗거리며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럼 어른이 없는데 어떻게 해? 장군이 데려가고 애들한테는 사료 대신 돈으로 보내 주면 되잖아.”
그게 아이들한테도 더 나을지 몰랐다. 장군이 돌보는 일은 아이들에게 벅찼다. 장우네 집에서도 장군이를 실제로 돌본 사람은 엄마와 아빠였다.
“괜히 더 골치 아픈 일 만들 거 없어. 애들은 학교나 이 동네 사람들이 돌봐 줄 테니까 우리는 그냥 하던 대로 사료만 보내 주면 돼.”
아빠가 장우를 외면한 채 말했다.
“사료를 장군이한테 안 주니까 그렇지. 아빠, 장군이 데려가고 애들한테는 돈으로 주자.”
장우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아빠를 졸랐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 아빠는 더 이상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끝까지 책임 못 질 거면 시작하지도 않는 게 좋다구. 모르는 데 팔았으면 편했을걸, 괜히. 애들 오기 전에 얼른 일어나.”
아빠가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재촉했다.
아빠 말이 맞았다. 장군이를 키우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책임졌어야 했다. 사정이 안 된다고 할아버지가 된 장군이를 남의 집으로 보내는 게 아니었다. 장우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마음 아파하는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장우는 이제라도 장군이를 끝까지 책임지고 싶었다.
“싫어. 장군이 데려갈 거야.”
장우는 엉덩이를 마루 안쪽으로 더 밀어 넣었다. 하지만 아빠는 단호한 표정으로 장우에게 말했다.
“아빠 먼저 차에 가 있을 테니까 빨리 나와.”
아빠가 밖으로 나간 뒤 혼자 남겨진 장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버텨야 할 이유가 필요했던 장우는 옷가지와 책들 틈에 놓여 있는 일기장을 보았다. 그 안에 장우를 잡아 줄 강력한 무언가가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장우는 잠시 망설이다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표지에 2학년 2반 김미리라고 씌어져 있었다. 어린 아이 것이라고 해도 남의 일기장을 보려니 양심이 찔렸다.
‘꼬맹이 일기 따위, 관심 없다구. 장군이를 데려갈 핑곗거리가 있나 보려는 거야.’
장우는 자신에게 변명하며 일기장을 넘겼다. 미리라는 애는 집 안 꼴처럼 글씨도 맞춤법도 엉망이었다. 선생님이 검사한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숙제가 아니라 스스로 쓴 일기인 모양이었다.

4월 8일
장군이가 쥐를 잡았다. 오빠가 삽에 퍼서 쥐를 갓따 버렸다. 장군아 무서운 쥐를 잡아조서 고마워. 그리고 밤에도 도둑놈을 지켜조서 고마워. ♡♡♡♡

4월 15일
장우 오빠 아빠가 장군이 사료를 보네왔다. 오빠랑 동물 병원에 가서 돈이랑 바꾸엇다. 쩌번에는 할머니랑 같이 가서 괜차났는데 오늘은 우리끼리만 가서 떨렸다. 오빠랑 마트에 가서 라면이랑 햄이랑 참치통조림이랑 샀다. 오빠가 새콤달콤도 샀다. 쩌번에는 한꺼번에 다먹었는데 이번에는 오래오래 아껴먹을 거다. 오빠가 장군이한테 미안하다고 소세지를 사줬다. 장군아 아빠 오면 사료 다 너 줄게.

4월 19일
오빠랑 장군이 운동 시킬라고 나갔는데 나쁜 오빠들이 우리를 때릴라고 했다. 장군이가 으르렁으르렁했다. 나쁜 오빠들이 겁먹고 도망쳤다. 바보들 우리 장군이는 착한 장군인 데. 장군이가 우리를 지켜조서 좋았다.

4월 23일
장군이 목욕을 시켰다. 장우오빠가 써준 종이에 목욕을 2주일에 한번씩 시키라고 했는데 추워서 못시켯다. 그래도 빗질하고 청소는 맨날맨날 해줬다. 장군이가 털을 막막막 털어서 오빠랑 나랑 물벼락을 맞았다. 오빠가 장군이를 한 대 때렸다. 나는 장군아 장난이야. 오빠가 너 안시러하는거 알지하고 꼭 안아주었다.

5월 4일
급식이 맛있었다. 미트볼이 쨀루 맛있다. 맨날맨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급식 먹으면 조켓다. 그럼 장군이한테 맛있는 사료 줄 수 있는데...

장우는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일기장을 덮었다. 장군이의 생생한 모습이 마음 구석구석에 뜨겁고 아픈 자국을 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장군이와 함께하는 아이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장군이가 이미 다른 아이에게 떼어 내기 힘들만큼 소중한 존재가 됐다는 사실은 상처를 더욱 아리게 헤집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장우네였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먼저 떠난 건 장군이가 아니라 장우였던 것이다. 아무 데나 팔아 버리지 않고 사료까지 대 줘 가며 괜찮은 집을 찾아 보냈다는 것은 위안은 될지언정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일기장 속의 장군이는 장우네 집에서 좋은 사료와 영양제를 먹고 식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 때보다 고생은 하고 있지만 불쌍하거나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장우는 자신과 가족이 그동안 장군이를 돌봐 주어야 할 대상으로만 대해 왔음을 깨달았다.
귀찮을 때도 많지만 말 못하는 동물이니까 보살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장군이에게 주려고만 했지 나누려고 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장우는 장군이와 두 아이가 서로 나누고 지켜 주고 돌봐 주며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됐음을, 아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우는 미닫이문에 몸을 기댄 채 집 안을 둘러보았다. 빨랫줄에 널린 미리의 낡은 스웨터와 그 애 오빠의 청바지에서는 더 이상 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의 젖은 자국까지 희미해졌다. 하지만 옷이 마른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그 옷은 마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장우는 벌떡 일어섰다. 미리의 일기장에서 장군이를 빼내가는 짓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일기장 속의 장군이는 부모 없는 아이들 곁을 지키는 듬직한 가족이었다. 그 앞에서 장군이의 주인 행세는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장우가 집 밖으로 나가자 아빠가 차의 시동을 걸었다. 말없이 아빠 옆자리의 문을 연 장우는 잠시 멈칫했다. 지난번 되가져 갔던 장군이의 개 껌과 두뇌개발 공 그리고 관절 영양제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날생선 대가리를 먹는 장군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 같았다. 그걸 장군이한테 주는 일은 자신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를 방문하는 것처럼 소용없는 짓 같아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것마저 팔아 버릴지도 몰랐다. 장우가 차에 오르자 아빠가 누군가에게 변명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냥 가는 게 나아. 애들도 우리 보면 불편할 거야.”
차가 움직이는 순간 장우가 소리쳤다.
“아빠, 잠깐만.”
차에서 내린 장우는 장군이 선물을 들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비록 편찮으셨을 때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더라도 무덤 속의 할머니는 장우를 기억하실 것이다.
장우는 장군이의 선물을 일기장 옆에 놓았다. 장우의 선물에 좋아하는 장군이의 모습이 담길 곳이었다.
돌아서던 장우는 마루에 굴러다니는 가정 통신문 뒷면에 ‘장군이 껌, 영양제, 장난감 공’ 하고 쓴 다음 선물 위에 올려놓았다. 그 정도면 물건 포장지에 영어로 이름과 설명이 씌어 있어도 알아볼 것이다. 만일 아이들이 사료처럼 팔아 버린다고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장군아, 잘 지내.”
장우는 일기장 속의 장군이에게 말했다.
장우가 다시 차에 탄 뒤 아빠는 말없이 운전하기 시작했다. 장우는 큰일을 하고 온 사람처럼 맥이 풀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차가 마을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섰을 때 장우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장군이야!”
장군이가 플라타너스 나무가 줄지어 선 도로 가장자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두 아이가 무어라 소리치며 따라왔다. 장군이는 한눈에도 장우네 집에 있을 때보다 여위고 털이 거칠어 보였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썰매를 끌며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던 자기 조상들처럼 늠름해 보였다.
장군이가 점점 가까워졌지만 아빠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장우를 태운 차는 그렇게 그리워했던 장군이 곁을 순식간에 지나쳐 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차의 옆 거울로 장군이와 아이들이 멀어져 가는 것을 훔쳐보면서 장우는 울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